孝第 仁之本 家和萬事成
효와 공경은 인의 근본이고,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일을 이룬다.
근세 전 인물 .
啓
이 단은 조선조 좌명원종공신 자헌대부 한성부윤 충청전라병마도절제사 남궁계(啓)를 추모 제향하는 단이다.
남궁계(啓)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이며 소부윤(少府尹) 우(祐)의 아들로 조선조에 음보로 등용되어 사과를 지내고 1401년(태종 1) 좌명원종공신 3등이 되었다. 1431년에 대호군에 올랐고 1426년(세종 8) 정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판의주목사가 되고 1435년 동지중추원사에 올랐다.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38년 한성부윤에 오르고 1443년 전라도절제사 1445년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1446년(세종 28)에 세상을 떠나니 세종께서 크게 애통하여 승지를 보내 문상하고 예관을 보내 상수를 내려 호상케 하였다. 배는 정부인 능성구씨로 후사가 없어 남궁좌(佐)의 셋째 아들인 치(致)를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
묘가 실전되어 제를 드리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자손들이 정성을 모아 1962년 10월 15일에 단을 만들어 높은 은덕을 영원토록 기리게 되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하고 있다.
佐
이 묘는 사온서승(司署丞)을 거쳐 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를 역임한 남궁좌(佐)와 배(配)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유택이다.
남궁좌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으로 고조 신(信)은 고려국자감 진사로 충숙왕조에서 벽상1등공신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고, 증조 진(瑨)은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이고, 조부 기(起)는 민부상서(民部尙書) 집현전제학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복(福)은 사복시판사(司僕侍判事)이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가 사온서승을 거쳐 지간성군사를 지냈고 정(政)·효(效)·치(致) 3남을 두었는데 10촌 병사공 계(啓)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셋째 치(致)를 입양계승하여 그 손이 번성하니 오늘의 함열남궁씨를 이룩하였다.
불행하게도 장남 정(政)이 무자하고 차남 효(效)도 6대손에서 절손되었으므로 시묘봉양(侍墓奉養)치 못하게 되어 출계 후손이 정성껏 봉제 수호를 하고 있다. 묘는 쌍봉으로 해좌에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致
이 묘(墓)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역임하고 병조참의(兵曹議)에 증직된 남궁치(致)의 유택이다.
남궁치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시조 원청(元淸)의 14세손으로 간성군사 좌(佐)의 셋째 아들이나 태종때 좌명원종 공신에 책록되고 대호군에 올랐으며 전라도절제사를 지내고 중추원부사에 이른 계(啓)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박천군수에 올랐다. 중종반정으로 손자인 찬(璨)이 복권될 때 같이 통정대부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옥천김씨(沃川金氏)이며 사향(巳向)으로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이조참판 순(順)을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順
이 묘는 이조참판(吏曹判)에 증직된 남궁순(順)과 배(配) 증 정부인(貞夫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순은 시조 원청(元淸)의 15세손이며 군수(郡守) 치(致)의 아들로 세종조에 출생하여 사마시에 급제하고 예부생원(禮部生員)으로 청렴 결백한 선비로 고고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 남궁찬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복권되어 증직을 받을 때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배 철원최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다. 특히 정부인 최씨는 청빈한 가문을 지키며 유복자 찬(璨)을 정성으로 가르쳐 강직한 공인으로 바르게 살게 하였으며 남궁씨(南宮氏) 문중을 중흥시키는 중조로서 자손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다. 부인은 높은 벼슬로 출세하는 것보다 자손이 번성하기를 염원하더니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켜 외아들 찬(璨)이 4남을 두어 대를 이어 번성하게되니 오늘의 남궁(南宮)씨는 단본이며 모두 한 자손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璨
이 묘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호은(壺隱) 남궁찬(璨)의 유택이다. 남궁찬은 자가 숙헌(叔獻) 호는 호은(壺隱)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증 이조참판 순(順)의 아들로 1453년(단종 1)에 출생했다.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경상도 도사·제주목사·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 등 제현을 신구하려는 상소를 극간했다가 용안에 유배되고 1504년(연산 10)에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에 어울리게 삼사사관(三司四館)에서 국사에 임하였고 후손들은 청족(淸族)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맑은 그 삶을 본으로 하고 있다. 유배길에 지은 묵죽(墨竹)과 묵매(墨梅)의 시서는 대가를 이루었다.
왕명으로 오늘의 자리에 안장되었고 묘전의 문관석은 크기가 웅장하고 모양이 특이한데 그의 충의심에 감격한 명의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명나라에서 제작하여 왔다고 전한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재 격이다. 배 정부인 안동김씨는 무후하고 계배 정부인 평산신씨에게 4남을 두었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璨
이 비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오위도총관·행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남궁찬의 신도비이다.
이 비는 1957년 9월 국가에 남긴 공적과 충절의 정신을 길이 계승하기 위하여 후손들의 정성으로 건립하였다.
남궁찬(璨)은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중시조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빈하여 나라에는 충(忠)으로, 부모에게는 효(孝)로, 정사에는 의(義)로 임하였다.
호는 호은(壺隱)이고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전북 익산의 용안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필(弼)·익(翼)·숙(淑)·열(說)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평산 신씨
세보(世譜) 16세 부제학공(副提學公)의 배위(配位)이시다.
1457년(세조 3) 2월 27일에 출생하셨으며 아버지는 대사성(大司成) 자승(自繩)이시고 할아버지는 한림대제학(翰林大提學) 개( )이시며 외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시다.
슬하에 4남 필(弼), 익(翼), 숙(淑), 열(說)과 2녀를 두셨는데 장남 필(弼)은 고창현감(高敞縣監), 차남 익(翼)은 임피현령(臨陂縣令), 3남 숙(淑)은 한성판윤(韓城判尹), 4남 열(說)은 습독관(習讀官)으로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弼
이 묘는 조선 때 현감을 지낸 남궁필(弼)과 배 숙인(淑人) 강화최씨(江華崔氏)·배 숙인(淑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필은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의 17세손이자 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찬(璨)의 장남으로 1475년(성종 6)에 출생했다.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아버지 남궁찬이 연산군의 폭정을 상소하다가 익산시 용안(龍安)으로 유배되니 그 뒤를 따라가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인한 병이라 치유되지 못하고 상을 당하니 애통·비감해 하며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그 뒤로는 스스로 산수주인(山水主人)이라 칭하며 예·악을 즐기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중종반정으로 부친이 사면되면서 고창현감의 관직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가숙제의도(家塾祭儀圖)』가 있다. 묘는 강화최씨와 합봉하였고 철원최씨는 왼쪽에 쌍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翼
이 묘는 통훈대부 임피현령을 역임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判)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된 남궁익(翼)과 배위 정부인 연안김씨의 유택이다. 남궁익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으로 부제학 찬(瓚)의 둘째 아들이며 1480년(성종11)에 출생하였고 호는 익지(翼之),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선친의 유언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40세에 음보로 관직에 나가 한성부 랑관, 수운판관, 동복현감, 임피현령을 지냈으며 부친 찬(瓚)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증직될 때 그도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슬하에는 교리 희(憘), 자헌대부 한성판윤 침(沈), 지평현감 기(愷)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淑
이 묘는 한성판윤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남궁숙(淑)과 배 정부인 완산이씨와 계배 정부인 고흥류씨와 삼합봉(三合封)이다.
남궁숙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이자 부제학 남궁찬(璨)의 셋째 아들로 1490년(성종 21)에 출생했다. 자는 숙부(淑夫), 본관은 함열로 선친의 억울한 죽음에 비분절통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형인 필(弼)과 익(翼)의 권유를 받아 1528년(중종 23) 뒤늦게 생원이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안산군수·성주목사에 이어 홍문관부정자·지평(持平)·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상호군(上護軍)·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한성부우윤·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동지 중추부사에 올랐다.
안산군수·성주목사 재임시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생활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슬하에는 연안부사 제(悌)와 승지 회(恢)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후손들이 추모 향사를 지낸다.
淑
이 신도비는 정헌대부 한성판윤을 역임한 남궁숙(淑)의 신도비이다. 남궁숙(淑)은 자가 숙부(叔夫)이고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부제학 남궁찬(璨)의 아들로 1528년(중종 23)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1536년 홍문관 부정자에 이어 지평·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가 되었다.
황해도·전라도·함경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정헌대부,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이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영을 위로하는 뜻으로 성심을 모아 1982년 비를 세웠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淑
이 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남궁숙(淑)의 선정비로 고을 백성 등을 위해 많은 치적선정을 하여 1547년(명종 2)에 건립하였다.
남궁숙(淑)은 자는 숙부(淑夫)이며 강원도관찰사 남궁찬(璨)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에 생원(生員)이 되고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박사에 임명되고 1536년(중종 31)에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지평(持平)·사간(司諫)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그 후 상호군(上護軍)과 황해도관찰사, 1550년(명종 5)에 전라도관찰사, 다음해에 한성부윤이 되고 1552년 (명종 7)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불취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전직되었다.
그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직시 백성을 다스리며 실천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첫째, 옛 폐단을 고쳐 정사를 새롭게 하고 둘째,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낭비를 없애고 절약하였으며 셋째, 백성을 사랑하고 송사는 명철하게 판단처리 하였다.
그가 1546년(명종 원년)에 병을 얻어 이임하니 그에 대한 고을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담아 비를 세웠다. 비문 끝절에 "공경하도다 공이여 우리 향토에 사랑을 주시었도다. 우리는 돌에 글로 새겨 영세토록 잊지 않으려고 명종 2년 정월에 이 비를 세우노라"고 기록하였다.
厚
이 묘(墓)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참봉공파조( 奉公派祖)인 진사 남궁후(厚)와 배위 공인전의이씨(恭人全義李氏)의 유택이다. 남궁후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고창공(高敞公) 남궁필(弼)의 둘째 아들로 1502년(연산군 8)에 출생하였으며 함열남궁씨의 7파조 중 참봉공파조이다.
한때 진사의 직에 나갔으나 관직이 없고 오로지 학문을 숭상하고 즐기며 후진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참봉의 직을 내렸으나 끝내 하지 않았으며 다만 고고한 선비로 살다가 향년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전의이씨이며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통덕랑 저(著), 차남은 경상도 도사·사성 지(芷), 삼남은 참봉을 지낸 무(茂)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憘
이 묘(墓)는 조선조때 교리(校理)를 역임한 남궁희(憘)와 배위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를 합봉한 유택이다.
남궁희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자 현령 남궁익(南宮翼)의 장남으로 1510년(중종 5)에 출생했다. 자는 구중(懼仲)이며 함열남궁씨 7파조 중 교리공파조(校理公派祖)이다.
30세에 초시를 거쳐 진사(進士)에 오르고 3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예문관검열, 대교, 홍문관 수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은퇴하고 1595년(선조 30)에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청풍군수 활(活)을 두었다. 묘는 선고(先考)의 묘 아래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이 묘는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한 남궁침( )과 배위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유택이다. 남궁침은 자가 성중(誠仲)이며 본관은 함열(咸悅)로 1513(중종 8)에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관찰사 찬(璨)의 손자이며 현령 익(翼)의 차남으로 출생 대사성공파의 파조이다.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고 1544년(중종 39)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48년(명종 3) 이조좌랑, 다음해 사인이 되고 1552년 경상도 암행어사·직제학·우부승지, 다음해에 좌승지를 지내고, 1557년(명종 12)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후 판결사(判決事),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564년 전라도 관찰사·형조참판·함경도 관찰사, 1566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슬하에는 직장 길( ), 영광군수 견( ),직장 식(湜), 건( ), 가선대부 도지중추부사 영(泳) 등 5형제를 두었다. 묘는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와 합봉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愷
이 묘는 통훈대부 지평현감을 역임한 남궁기(愷)와 배 숙인(淑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유택이다.
남궁기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현령공(縣令公) 남궁익(南宮翼)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낙중(樂仲),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1517년(중종 12)에 출생했고, 함열남궁씨 7파조 중 지평공파조(砥平公派祖)이다. 23세때 과거에 등과하여 생원 진사에 오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현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인 전주이씨이며 슬하에 통덕랑 도(渡), 예부생원 준(濬), 무관 만호 판관 섭(涉)의 3형제를 두었다.
묘는 합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悌
이 묘는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김천군수·배천군수·연안부사를 역임한 죽계(竹溪) 남궁제(梯)와 배 숙부인(淑夫人)풍천임씨(豊川任氏)의 유택이다. 남궁제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 숙(淑)의 아들로 1543년(중종 38)에 출생했다. 자는 중우(仲友),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함열이다. 함열남궁씨의 7파조중 연안공파조(延安公派祖)이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 급제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1572(선조 5) 평강현령, 진감현감, 의령어사를 지내는 동안 치적이 있어 왕으로부터 "거관근검부역평균(居官勤儉賦役平均)"이라는 여덟자를 포상받았다. 그 후 사섬시정을 거쳐 김천·백천군수, 평산·연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전조사(轉漕使)로서 군수물자 수송에 공을 세웠다.
슬하에는 장남 계공랑 행(荇) 차남 사무음사 명(蓂), 3남 함경순변사 헌(憲),4남은 주부 협(莢)을 두고 묘는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恢
이 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남궁회(恢)의 유택이다.
남궁회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숙(淑)의 아들로 1546년(명종 1)에 출생하였다. 자는 군곽(君廓)이며 8세에 선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관직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학문연마에만 전념하였고 효심 또한 극진하였다.
높은 경륜과 덕망을 인정받아 교관에 임명하였으나 수락하지 않았고 다시 금오랑(金吾郞)에 명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어머님을 모시고 강원도 홍천군 월운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이며 묘는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발(發), 진(盡), 급( )의 3형제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추모향사를 지낸다.
崇
세보(世譜) 18세. 호(號)가 모현재(慕賢齋)로 습독공(習讀公)의 4자(四子)로 태어나셨으며 모현공파(慕賢公派)의 파조이시다.
위로 세 분의 형님이 계셨으나 모두 후손이 끊어지고 공만이 습독공의 후사(后嗣)를 이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크게 번창하였다.
1975년 병진대보(丙辰大譜) 수보(修譜) 때 처음으로 공의 후손을 모현공파로 분리하여 공이 파조(派祖)가 되셨으며 우리 남궁씨(南宮氏)는 6파에서 7파로 늘어났다.
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만세곡(萬世谷) 선영국 내에 단비(壇碑)를 모셔 치제(致祭)하고 있다.
근세 인물 .
한서(翰西) 남궁억은 구한말(舊韓末) 기울어가는 국운을 세워보려고 관계에서 정계에서 또한 언론계에서 정열을 바쳐 싸웠고 종교·교육 및 비밀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다.
1863년 12월 27일 한성 왜송골에서 출생하였으며 호(號)는 한서(翰西)로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사숙한학(私塾漢學)을 수학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20세때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후 내부주사(內府主事)로 임관되어 고종황제의 어전통역(御前通譯)으로 활동하고 1887년 영국·독일·러시아 등 외국순방에 참여하였으며 1889년 궁내부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어 4년간 고종황제를 시봉하였다.
칠곡부사로 임명되었다가 1896년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한 독립협회 수석총무와 서법요원이 되어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우고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하여 대역부도 죄로 몰아 남궁억, 이상재, 방한덕 등 18명을 투옥하였다. 얼마 후 고종의 특별은사령(特別恩赦令)으로 석방되었으나 1898년 독립협회는 종말을 고하고, 동년 9월 5일 윤치호, 장지연, 이상재, 라수연 등과 손을 잡고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일간신문으로 발행하였다.
이 시비(詩碑)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한서(翰西) 남궁억(檍)의 무궁화시비이다.
남궁억은 시조 원청(元淸)의 30세손으로 중추도사 영(泳)과 배(配) 덕수이씨와의 12남매 중 외아들로 1863년(철종14)에 출생했다.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는 한서(翰西)이다. 20세때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22세에 고종황제의 통역관이 되어 다재다능(多才多能)한 능력이 인정되어 23세에 내부주사의 관직을 받아 칠곡부사·성주목사·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내부토목국장때에는 정동 육조와 남대문사이 광화문길을 확장하고 파고다공원을 만드는 등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총무직을 맡아 독립신문 발간·독립문 건립·황성신문 창간 무궁화의 국화지정에 힘썼다. 1933년 무궁화당 사건으로 투옥, 1939년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일가들이 정성을 모아 무궁화노래를 새겨 독립기념관에 시비를 세웠다. 그 때가 1988년이며 자녀는 초대뉴욕총영사 염(炎)과 2녀를 두었다.
그의 업적을 보면 첫째, 황성신문사장·광동학회장 등 언론활동을 하였고 둘째, 무궁화를 국화로 제정하고 무궁화자수본 등으로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셋째, 양양현산학교와 홍천모곡학교를 창립하고 배화학당(현 배화여고)과 상동청년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넷째, 서예의 대가(大家)로 궁체를 보급하고 다섯째,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차례 투옥생활을 하였고 여섯째, 저서로는 동사략·조선이야기·가정교육 등 10여편과 무궁화노래·기러기노래·일하러가세 등 많은 노래를 지어 보급하였다.
公은 세보상(世譜上) 32世이며 대사성공(大司成公) 무편(戊編)에 속(屬)한다. 號는 초몽(草夢)이고 인천 강화(江華)에서 아버지 훈(薰)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一男一女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였다. 1894年에서 1921年 까지 시인(詩人)으로서 짧은 삶을 살았다.
1912年 서울 한성고등보통학교(漢城高普)를 졸업(卒業)하고 오산중학교 교사(敎師)로 잠시 재직(在職)하였다.
그 뒤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협회(東京音樂協會) 간사(幹事)로도 있었으며,1920年에 창간(創刊)된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변 영로(卞 榮魯), 오 상순(吳 相淳), 염 상섭(廉 想涉) 等과 교분(交分)하던 구한말(舊韓末) 5大 시인(詩人)으로 꼽히는 천재(天材)이기도 하나 너무 짧은 생애(生涯)가 가슴아프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彊會月報) 1907年 1월號에 투고(投稿)하였던 애국설(愛國設)에서 당시(當時) 지도층(指導層)의 각성(覺醒)과 청소년교육(靑小年敎育)의 중요성(重要性)을 촉구(觸具)하기도 하였다.
작품 활동(作品 活動)은 主로 "청춘"과 "폐허" 및 "조선일보" 일본잡지인 "태양"을 중심(中心)으로 전개(展介) 되었는데, 일어(日語) 및 영어(英語)로 된 시(詩)와 수필(隨筆)도 있다. 1918年 "청춘"에 "孤獨은 너의 運命이다" 等 5篇의 일문시(日文詩)와 "나의 세상" "나의 사랑" 等 2篇의 영문시(英文詩)가, "폐허(閉墟)"에는 수상(隨想) "자연(自然)"(1920), "풀"(1921), "생명의 비의(生命의 秘義)"(1921) 등 4篇의 詩, 조선일보(朝鮮日報)에는 "신비의 인연(神秘의 因緣)", "출생(出生)" 等 7篇의 詩가, 1922年 "신생활"에는 "별의 아픔", "마(馬)" 等 5篇의 유고시 및 일기(日記)가 실려있다. 27歲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작품 수(作品 數)가 극히 한정(限定)되어 있으나, 얼마 남기지 못한 유작(遺作)들은 한국근대(韓國近代) 시사(詩史)에서 특이(特而)한 시세계(詩世界)를 보이고 있다. 卽, 유년기(幼年期)의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관념(觀念)과 초기시(初期詩)에서 보이는 미(美)와 우주적(宇宙的) 조화(調和)를 포함한 다양성(多樣性), 그리고 "폐허"지로 부터 본격화(本格化)한 시작(詩作)들이 지니는 사상(思想)이 시적(詩的) 특색(特色)이 되고 있다.
그의 문학(文學)은 당시(當時) 우리 문단(文壇)에 만연(蔓延)되고 있었던 병인적(病因的) 퇴폐성(退閉性)이나 감상(感想)에 물들지 않고, 그 나름대로 자연(自然)의 순실미(純實美)와 ‘생명의 비의’와 대지사상 等을 추구(追求)한 것 等을 특색(特色)으로 들 수 있다.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고려벽상공신(高麗壁上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역임(歷任)하신 諱 신(信)公의 9代孫이시고 간성공(杆城公)의 5대손(五代孫)이시다. 中宗 十一年(1526年)에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에서 아버지 諱 집(緝)公의 長男으로 비 교적(比較的) 부유(富裕)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1555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給第)하여 진사(進士)가 되tl고 그의 비범(非凡)한 재주와 문장(文章)이 성균관(成均館)에 까지 명성 (名聲)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그의 詩를 즐겨 외웠다.
公은 서울로 집을 옮기고 시골에는 첩(妾) 한 사람을 두어 매년(每年) 추수(秋收)를 하여 올려가곤 하였는데 妾은 절세미모(絶世美貌)에다 재주까지 비범(非凡)하여 그림과 글씨에 무불능통(無不能通)하니 公께서 지극(至極)히 총애(寵愛)하셨다. 그러나 妾이 이성(異姓)의 조 카와 간통(姦通)하는 것을 목격(目擊)하고 두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인 後 금대산(金臺山)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에 머물다가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의령야암(宜寧野菴)이라는 암자(庵子)에 머물게 되었다.그러던 어느날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도교(道敎)의 방술(方術)이 뛰어난 노승(老僧)이 무주(茂州) 치상산(稚裳山)의 어느 암자(庵子)에 기거(起居) 한다는 소식(所息)을 접(接)하시고 무주(茂州)에 있는 치상산(稚裳山)으로 찾아가서 그 노승(老僧)을 만나 신선술(神仙術) 수련(修練)에 입문(入門)하게 되었다. 수련과정(修練過程)은 정신통일(精神統一)을 위하여 잠 안자는 法과 곡기(穀氣)를 끊는 法을 익히고 이를 응용(應用)하여 내단수련(內丹修練)의 극치(極致)인 신태(神胎) 일보직전(一步直前)까지 도달(到達)하였다고 한다.
한 때는 오성(鰲城) 이 항복(李 恒福)이 젊었을 때 80이 넘은 公을 만나 감탄(感歎)하며 “선생(先生)께서는 90이 다 되셨는데도 정력(精力)이 젊은 사람 같으니 어떤 비방(秘方)을 쓰십니까”라고 질문(質問) 하였다고 류 광익(柳 光翼)의 저서(著書)인 사암집화(私岩輯話)에 소개(紹介)되기도 한다.이 수광(李 수光)은 그의 저서(著書)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소개(紹介)하기를 "언제나 명산 대천(名山 大川)을 떠 돌아다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가히 지선(地仙 : 땅위에 사는 神仙)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는 뛰어난 단학자(丹學者)로서 신선술(神仙術)의 대가(大家)이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위험(危險)에 처하여 피신(避身)한 젊은 충무공(忠武公) 이 순신(李 舜臣)을 만나 자식같이 돌보며 심신(心身)의 연마(硏摩)와 무예(武藝)를 가르쳐 후일(後日) 구국(求國)의 명장(名將)으로 왜적(倭敵)으로부터 조선(朝鮮)의 바다를 지켜 나라를 求하게 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조선 중기(朝鮮 中期)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때의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 두 선생전"은 "홍길동전"과 함께 쌍벽(雙壁)을 이루는 소설(小說)이다. 슬하(膝下)에 외아들 인(引)을 두었으나 불행(不幸)하게도 그 後에 기록(記錄)이 없어 아쉬움을 금(禁)치 못한다.
주: 참고문헌(參考文獻)으로는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과 신선단학(神仙丹學), 류 광익(柳 光翼)이 지은 사암집(私岩輯)과 류 몽인(柳 夢寅)이 지은 야담선도부(野談仙道部)가 있다.
남궁이 해냈어!
6.25 전쟁(戰爭) 中이던 1952年 10月 21日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임시(臨時) 수도(首都) 부산(釜山)에서는 감격적(感激的)인 사건(事件)이 벌어졌다.
1만 680톤 중량(重量)의 한국(韓國) 국적(國籍) 화물선(貨物船) 미스코리아號가 미국 서해안(美國 西海岸)의 포틀랜드港을 向하여 부산항(釜山港) 제 1 부두를 출항(出航)하는 일이다.
출항식(出航式)에 참석(參席)한 리 승만(李 承晩) 대통령(大統領)은 테이프를 끊기 전에 선내(船內)를 둘러보면서 박 옥규 선장(後에 海軍參模總長 歷任) 이하(以下) 항해사(航海士)와 기관사(機關士)들에게 흥분(興奮)된 어조(語調)로 “자네들, 이 배를 몰고 정말 미국(美國)에 갔다 올 수 있나?” 라고 물었다. “각하(閣下), 염려(念慮)하지 마십시오. 자신(自信) 있습니다.” 선장(船長)은 힘차게 대답했다. 李 大統領은 매우 흐뭇한 표정(表情)으로 일일이 선원(船員)들의 등을 두들겨 주며 격려(激勵)하였다.
李 大統領으로서는 일만톤급 한국(韓國) 국적(國籍)의 화물선(貨物船)이 가득히 고철(古鐵)을 싣고 대미(對美) 항로(航路)에 취항(就航)하는 것이 여간(如干) 대견스럽지 않았다. 대통령(大統領)은 큰 목소리로 “南宮이가 해냈어! 기어이 해냈어!” 라고 감격(感激)에 벅찬 말을 연발(連發)하였다. 大統領의 얼굴은 상기(上氣)되었고 더욱 흥분(興奮)되었다. 이 날의 주인공(主人公) 미스코리아 號의 선주(船主)는 극동해운㈜의 사장(社長), 38歲, 신장 180㎝의 당당한 체구(體驅)의 미남청년(美男靑年) 일본대 경제학부(經濟學部)를 졸업한 남궁 련(南宮 鍊)이었다. 당시(當時)에는 1만톤급 대형 화물선(大形 化物船)의 보유(保有) 국가(國家)가 다섯 나라도 안되었으며 일본(日本)도 갖지 못한 상태(狀態)였다.
1946年에 극동기업㈜을 출발(出發)로 사업(事業)을 시작(始作)하고 1949年에 극동해운㈜을 설립(設立)하여 3年 後에 이런 위대(偉大)한 일을 해내었으니 참으로 어른의 안목과 능력은 경이로운 바 있다. 그 후 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우리 나라 해운의 종가격인 대한해운공사의 사장(社長)으로 한국(韓國) 해운(海運)의 개척자(開拓者)의 자리에 당당히 임하게 되었다. 1958년 한국석유㈜를 설립(設立) 정부(政府)의 요청(要請)으로 울산에다 석유화학단지(石油化學團地) 건설(建設)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樹立)하고 대규모(大規模) 정유공장(精油工場)을 건설(建設)하기 위한 교섭차(交涉此) 도미(渡美)하였는데 4.19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좌절(挫折)의 큰 아픔을 안게 되었다.
5.16 이후에는 한국경제인협회(全經聯의 前身) 부회장(副會長)으로 군사 정부(軍事 政府)의 경제개발정책(經濟開發政策)에 적극(積極) 참여(參與)하고 한국종합제철㈜ 이사, 경제심의회 의원, 금융통화위원으로 활약(活躍)하면서 울산을 공업기지(工業基地)로 선정(選定)하는 많은 아이디어를 창출(創出)하여 제공(提供)하였다. 1968년에는 박대통령의 요청(要請)으로 노사 분규(勞使 紛糾)와 적자경영(赤子經營)으로 파산(破産) 직전(直前)인 대한조선공사를 인수(引受)하여 20년간 사장, 회장을 역임(歷任)하였으며 1973년에 온 재산(財産)을 투입(投入)하여 옥포에 조선소(造船所)를 건설(建設)하여 박대통령 임석하(臨席下)에 발주식(發注式)을 거행(擧行)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세계적 규모(世界的 規模)의 시각(視覺)을 가진 기업인(企業人)이었으며 한국(韓國)의 기적(奇蹟)은 곧 우리 해운(海運)과 조선(造船)에 의해 선도(先導)되었다 해도 결코 과언(過言)이 아니다. 바다와 함께 배와 함께 오로지 나라의 경제 재건(經濟 再建)을 위해 한 평생(平生)을 다 바치신 거인(巨人)이요, 자랑스러운 남궁(南宮)의 후손(後孫)이다.
그냥 좋아서
특기(特記)해야 할 일은 취미(趣味)로 즐겨 하셨던 컬렉션 이야기다. 고미술(古美術)에 관심(關心)을 가지시고 그냥 좋아서 모은 것이라는데 소장(所藏)한 것이 무려 3,000점이나 된다는 사실(事實)이다. 그 중에는 불상(佛象), 금관(金冠), 금채도기(金彩陶器) 등 진귀(眞貴)한 것들이 많고 국보(國寶)로 지정(指정)된 것, 국보급(國寶級), 보물급(寶物級)에 비견(比肩)할 만한 것이 상당수(相當數)이다. 또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 유물(遺物)이 800여점, 수백점의 탈 등 재미있는 물건(物件)과 대단한 物件들이 고루 있어 한국미술사(韓國美術史)를 바꾸어 놓을 만큼 귀중(貴重)한 것들이라는 중평(重評)이다.
代를 이은 종사(宗事)에 헌신(獻身)
27世 諱 복의 3男 1女 중 3男으로 1915年에 양주(陽州) 루원(樓院 : 現 방학동)에서 출생(出生)하였으며 호(號)는 강석(江石)이시고 항렬(行列)은 28世 윗 금(金)이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종사(宗事)를 도우셨다.
公께서는 선조(宣祖) 38年(1605年)에 아버지 諱 부와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4男 1女 中 4男으로 출생(出生)하시었고, 중부(仲父)이시며 통정대부 음사(通政大夫 蔭仕),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돈녕부 직장(敦寧府 直長), 무주현감(茂州縣監)을 지내신 諱 격(格)公에게 입양(入養)되어 교리공(校理公) 병편(丙編) 21世로 代를 이으셨다.
字는 회이(晦而)이시고 관직(官職)은 통사랑(通仕郞)에 올랐으며 덕행(德行)과 학문(學文)이 뛰어나 칭송(稱頌)을 받았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因)하여 인조(仁祖) 임금이 삼전도(三田度 : 지금의 송파)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무릎 꿇고 항복(降伏)하는 것을 보고 비분애통(비분애통)하시고 한비(汗碑 :오랑캐의 碑石)가 세워지니 그 땅을 더럽게 여겨 105결(結: 30萬坪)의 토지(土地)의 재산권(財産權=文書)을 불사르고 다시는 자기 소유(所有)로 삼지 않았으며 생각하지도 않고 의연(毅然)히 강원도 홍천 모곡으로 은거(隱居)하여 한 生을 마감하시니 세인(世人)들은 그를 칭송(稱頌)하여 노중련(魯仲連 :魯나라의 學者)과 같은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배위(配位)는 현풍 곽씨(玄豊 郭氏)와 장수 황씨(長水 黃氏)사이에서 3男 5女를 두시니 長男은 장연부사(長淵府사) 諱 후, 次男은 諱 무, 3男은 諱 서 이며 5女는 이 지학(李 志學), 신 준(申 準), 강 여위(康 汝衛), 윤 익준(尹 益雋), 윤 흥일(尹 興一)이다. 효종(孝宗) 7년(1656年)에 향년(享年) 52歲로 타계(他界)하셨다. 墓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동막골 선영하(先塋下) 亥坐에 모시었다.
근세 분야별 인물 .
호씨는 아버지 엽(燁)님과 어머니 류씨의 3남중 장남으로 1931년 가평군 청평에서 출생. 세보상으로 32세(참.을)에 속한다.완(琓)씨는 아버지 항(항)씨와 어머니 경주인 김오순씨의 5남중 차남으로 1933년 가평군 청평에서 출생. 세보상으로 같은 32세 (참.을)에 속한다.
두사람은 한 마을에 살면서 1950년 6.25가 발발되어 국군이 남하하니 고향 청평은 공산 치하에 있게 되었다. 이에 비분강개하여 15명의 동지들이 모여 뜻을 같이 하기로 결의 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결사 항전 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들은 수차례 모의하고 투쟁을 개시하려고 일어서다 내무서원에게 발각되어 납북의 길에 오르게 되었으나 그 중 두명은 도망하여 살았고 나머지 13명은 북으로 간 뒤 55년이 지나도록 생사를 알 수 없다. 가평군의 뜻있는 분들이 마음을 모아 이들의 애국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청평초등학교 교정에 장의탑을 세웠다.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빈다.
아버지 삭(삭)씨와 어머니 금성 나씨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1933년 1 22일 충남 부여에서 출생. 6.25 발발과 함께 군에 입대하여 참전하게 되었으나 전사하였다. 이의 장렬한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강경 미륵사에는 수길씨의 위령탑이 세워졌다. 세보상으로는 32세(대.병)에 속한다.
아버지 열(烈)씨와 어머니 파평 윤씨와의 4남 3녀중 차남으로 1924년 7월15일 충남 부여에서 출생. 6.25전쟁에 종군하여 전란중에 실종 되었으나 그의 용감한 전력을 기록하여 부여 부소산에 위령탑을 건립하여 추념하고 있다. 세보상으로 32세(대.병)에 속한다.
현대 인물 .
기업인으로,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의 초대 사장을 역임
1. 생애
- 1915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
- 일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함
-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 관리로 일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교 통부 해운국 과장, 상공부 수산국장 등을 역임
- 1950년 1월에는 자본금 3억 원으로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 취임
- 1969년에는 국내 최초로 수출선을 건조했고, 1974년에는 미국 걸프사로부터 발주 받아 국 내 최초로 대형 유조선을 건조
- 1979년에는 대한조선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중공업 사장, 한국석유개발공사 사장 등을 역임
- 2002년 11월 30일 향년 87세로 별세
2. 업적
- 남궁연은 대한조선공사를 이끌며 대한민국 조선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
- 그의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 조선업 시장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 남궁연은 조선업뿐만 아니라 중공업, 석유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약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3. 평가
- 남궁연은 대한민국 조선업의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업인 중 하나로 꼽히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으로, 메트로신문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1. 출생
- 생년월일: 194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2. 학력
- 연세대학교 졸업
3. 경력
- 2005년부터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회장
-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사장
- 2002년 브이오엔 대표이사 회장
- 1985년 정보산업협회 부회장
- 1976년 포철기업 사장
4. 수상 - 2013년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특별상
- 2012년 제19회 장한 고대언론인상
- 2011년 제48회 한국출판문화상 대상
5. 저서
- <메트로신문사 사장 남궁호의 경영 에세이> (2006년, 에세이퍼블리싱)
6. 기타
- 남궁호는 메트로신문사를 창간하여 10여 년간 이끌어오면서, 신문사의 발전과 함께 대한 민국 언론계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 그는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브이오엔, 정보산업협회, 포철기업 등 다양한 기업에서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였다.
- 남궁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라는 책을 출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경영에 대한 조언과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다.
남궁호는 대한민국의 언론과 기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업적과 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
1. 출생
- 1912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출생.
- 서울 철도중학교를 졸업.
2. 정치 경력
- 1945년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여군 위원장, 조선민족청년단 부여군 단장을 지냈다.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 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1948년 8월 7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 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지만 신병으로 인해 출마하지 못했다.
3. 사망
- 1986년 11월 24일 사망
남궁현은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공무원 출신 기업인
1. 출생
- 1938년 2월 28일, 경기도 용인
2. 학력
- 선린상업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 경력
- 중앙일보 입사, 동양방송 기획실장 등 역임
- 1975년 삼성전자 기획조정실장
- 1982년 사표 제출 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공부
- 1986년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근무
-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 PC통신(현 KT알파) 초대 사장
- 1993년 삼성그룹으로 돌아와 삼성SDS 사장
- 1998년 말부터 2000년 초까지 정보통신부 장관
-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용인시 갑 선거구에 출마 남궁석은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IT 산업 육성과 정보화 사회
구현에 기여하였으며, 삼성SDS 사장 시절에는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정치인
1. 출생
- 1942년 12월 20일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교촌리
2. 학력
- 서울 중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3. 경력
-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추진 협의회에서 활동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선거대책 본부 부대변인 역임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광명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 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
- 1997년 새 천년민주당 창당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
- 1998년 대통령 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임명
- 2000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2002년까지 재직
- 새 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열린우리당 고문 등 역임
남궁진은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특히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문화 예술과 관광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교육학자
1. 출생
- 1949년 9월 15일,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2. 학력
- 중앙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
3. 경력
- 관동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 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역임
4. 저서
- 교육의 역사 철학적 기초
- 교육학 총론
- 한국 개화기의 사회교육 연구
- 일제 침탈기의 민족 사회교육 연구
남궁용권은 교육학자로서 교육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한국의 사회교육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산부인과 의사
1. 출생
- 1956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
2. 학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석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박사
3. 경력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과장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의무부총장 겸 의무원장
경제 관료 출신
1. 출생
- 1951년 서울
2. 학력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 행정고시 10회로 공직에 입문
3. 경력
- 재정경제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 등을 추진하여 경제 안정화에 기여했다.
- 기획예산처에서는 예산총괄심의관과 재정기획국장 등을 역임하며 국가 재정의 효율적인 운용과 투명성 제고에 기여했다.
- 예금보험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부실 금융기관 정리와 공적자금 회수 등을 통해 예 금자 보호와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했다.
- 금융통화위원으로 활동하며 통화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참여했다.
남궁훈은 공직 생활 동안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쌓아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기업인으로, 아이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와 재단법인 게임인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1. 출생
- 1962년생
2.학력
- 서강대학교를 졸업
3.경력
- 카카오의 공동창업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 카카오게임즈의 대표이사를 거쳐 2022년 3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카카오의 대표이사를 역임하였다.
- 2023년 11월 아이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 2020년에는 제12회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게임산업 발전 유공 부문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 하였다.
게임인재단 이사장으로서 게임 산업의 발전과 게임 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게임 산업이 더욱 발전하고 건강한 게임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배우로 1999년 데뷔 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연 역할에 머무르며 무명의 시 절을 보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며 주연급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주연을 맡은 후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 '마이 시 크릿 호텔', '김과장', '스토브 리그', '검은 태양', '낮과 밤', '닥터 프리즈너', '365: 운명을 거 스르는 1년', '어느 날', '천원짜리 변호사' 등에 출연하며 주연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영화 '비정규직 특수 요원', '라이트 마이 파이어', '월색유인' 등에도 출연하며 스크린에서도 활약하였다.
2024년 제60회 백상예술대상 TV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고 2023년 MBC 연기대상 대상, 2023년 제36회 그리메상 최우수 연기자상, 2023년 제14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 총리 표창을 수상하였다.
남궁민은 연기력과 흥행력을 모두 갖춘 배우로 평가받으며, 대한민국의 대중문화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근세 전 인물 .
啓
이 단은 조선조 좌명원종공신 자헌대부 한성부윤 충청전라병마도절제사 남궁계(啓)를 추모 제향하는 단이다.
남궁계(啓)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이며 소부윤(少府尹) 우(祐)의 아들로 조선조에 음보로 등용되어 사과를 지내고 1401년(태종 1) 좌명원종공신 3등이 되었다. 1431년에 대호군에 올랐고 1426년(세종 8) 정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판의주목사가 되고 1435년 동지중추원사에 올랐다.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38년 한성부윤에 오르고 1443년 전라도절제사 1445년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1446년(세종 28)에 세상을 떠나니 세종께서 크게 애통하여 승지를 보내 문상하고 예관을 보내 상수를 내려 호상케 하였다. 배는 정부인 능성구씨로 후사가 없어 남궁좌(佐)의 셋째 아들인 치(致)를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
묘가 실전되어 제를 드리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자손들이 정성을 모아 1962년 10월 15일에 단을 만들어 높은 은덕을 영원토록 기리게 되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하고 있다.
佐
이 묘는 사온서승(司署丞)을 거쳐 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를 역임한 남궁좌(佐)와 배(配)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유택이다.
남궁좌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으로 고조 신(信)은 고려국자감 진사로 충숙왕조에서 벽상1등공신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고, 증조 진(瑨)은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이고, 조부 기(起)는 민부상서(民部尙書) 집현전제학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복(福)은 사복시판사(司僕侍判事)이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가 사온서승을 거쳐 지간성군사를 지냈고 정(政)·효(效)·치(致) 3남을 두었는데 10촌 병사공 계(啓)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셋째 치(致)를 입양계승하여 그 손이 번성하니 오늘의 함열남궁씨를 이룩하였다.
불행하게도 장남 정(政)이 무자하고 차남 효(效)도 6대손에서 절손되었으므로 시묘봉양(侍墓奉養)치 못하게 되어 출계 후손이 정성껏 봉제 수호를 하고 있다. 묘는 쌍봉으로 해좌에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致
이 묘(墓)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역임하고 병조참의(兵曹議)에 증직된 남궁치(致)의 유택이다.
남궁치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시조 원청(元淸)의 14세손으로 간성군사 좌(佐)의 셋째 아들이나 태종때 좌명원종 공신에 책록되고 대호군에 올랐으며 전라도절제사를 지내고 중추원부사에 이른 계(啓)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박천군수에 올랐다. 중종반정으로 손자인 찬(璨)이 복권될 때 같이 통정대부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옥천김씨(沃川金氏)이며 사향(巳向)으로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이조참판 순(順)을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順
이 묘는 이조참판(吏曹判)에 증직된 남궁순(順)과 배(配) 증 정부인(貞夫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순은 시조 원청(元淸)의 15세손이며 군수(郡守) 치(致)의 아들로 세종조에 출생하여 사마시에 급제하고 예부생원(禮部生員)으로 청렴 결백한 선비로 고고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 남궁찬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복권되어 증직을 받을 때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배 철원최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다. 특히 정부인 최씨는 청빈한 가문을 지키며 유복자 찬(璨)을 정성으로 가르쳐 강직한 공인으로 바르게 살게 하였으며 남궁씨(南宮氏) 문중을 중흥시키는 중조로서 자손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다. 부인은 높은 벼슬로 출세하는 것보다 자손이 번성하기를 염원하더니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켜 외아들 찬(璨)이 4남을 두어 대를 이어 번성하게되니 오늘의 남궁(南宮)씨는 단본이며 모두 한 자손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璨
이 묘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호은(壺隱) 남궁찬(璨)의 유택이다. 남궁찬은 자가 숙헌(叔獻) 호는 호은(壺隱)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증 이조참판 순(順)의 아들로 1453년(단종 1)에 출생했다.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경상도 도사·제주목사·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 등 제현을 신구하려는 상소를 극간했다가 용안에 유배되고 1504년(연산 10)에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에 어울리게 삼사사관(三司四館)에서 국사에 임하였고 후손들은 청족(淸族)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맑은 그 삶을 본으로 하고 있다. 유배길에 지은 묵죽(墨竹)과 묵매(墨梅)의 시서는 대가를 이루었다.
왕명으로 오늘의 자리에 안장되었고 묘전의 문관석은 크기가 웅장하고 모양이 특이한데 그의 충의심에 감격한 명의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명나라에서 제작하여 왔다고 전한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재 격이다. 배 정부인 안동김씨는 무후하고 계배 정부인 평산신씨에게 4남을 두었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璨
이 비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오위도총관·행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남궁찬의 신도비이다.
이 비는 1957년 9월 국가에 남긴 공적과 충절의 정신을 길이 계승하기 위하여 후손들의 정성으로 건립하였다.
남궁찬(璨)은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중시조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빈하여 나라에는 충(忠)으로, 부모에게는 효(孝)로, 정사에는 의(義)로 임하였다.
호는 호은(壺隱)이고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전북 익산의 용안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필(弼)·익(翼)·숙(淑)·열(說)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弼
이 묘는 조선 때 현감을 지낸 남궁필(弼)과 배 숙인(淑人) 강화최씨(江華崔氏)·배 숙인(淑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필은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의 17세손이자 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찬(璨)의 장남으로 1475년(성종 6)에 출생했다.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아버지 남궁찬이 연산군의 폭정을 상소하다가 익산시 용안(龍安)으로 유배되니 그 뒤를 따라가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인한 병이라 치유되지 못하고 상을 당하니 애통·비감해 하며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그 뒤로는 스스로 산수주인(山水主人)이라 칭하며 예·악을 즐기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중종반정으로 부친이 사면되면서 고창현감의 관직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가숙제의도(家塾祭儀圖)』가 있다. 묘는 강화최씨와 합봉하였고 철원최씨는 왼쪽에 쌍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翼
이 묘는 통훈대부 임피현령을 역임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判)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된 남궁익(翼)과 배위 정부인 연안김씨의 유택이다. 남궁익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으로 부제학 찬(瓚)의 둘째 아들이며 1480년(성종11)에 출생하였고 호는 익지(翼之),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선친의 유언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40세에 음보로 관직에 나가 한성부 랑관, 수운판관, 동복현감, 임피현령을 지냈으며 부친 찬(瓚)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증직될 때 그도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슬하에는 교리 희(憘), 자헌대부 한성판윤 침(沈), 지평현감 기(愷)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淑
이 묘는 한성판윤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남궁숙(淑)과 배 정부인 완산이씨와 계배 정부인 고흥류씨와 삼합봉(三合封)이다.
남궁숙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이자 부제학 남궁찬(璨)의 셋째 아들로 1490년(성종 21)에 출생했다. 자는 숙부(淑夫), 본관은 함열로 선친의 억울한 죽음에 비분절통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형인 필(弼)과 익(翼)의 권유를 받아 1528년(중종 23) 뒤늦게 생원이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안산군수·성주목사에 이어 홍문관부정자·지평(持平)·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상호군(上護軍)·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한성부우윤·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동지 중추부사에 올랐다.
안산군수·성주목사 재임시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생활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슬하에는 연안부사 제(悌)와 승지 회(恢)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후손들이 추모 향사를 지낸다.
淑
이 신도비는 정헌대부 한성판윤을 역임한 남궁숙(淑)의 신도비이다. 남궁숙(淑)은 자가 숙부(叔夫)이고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부제학 남궁찬(璨)의 아들로 1528년(중종 23)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1536년 홍문관 부정자에 이어 지평·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가 되었다.
황해도·전라도·함경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정헌대부,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이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영을 위로하는 뜻으로 성심을 모아 1982년 비를 세웠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淑
이 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남궁숙(淑)의 선정비로 고을 백성 등을 위해 많은 치적선정을 하여 1547년(명종 2)에 건립하였다.
남궁숙(淑)은 자는 숙부(淑夫)이며 강원도관찰사 남궁찬(璨)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에 생원(生員)이 되고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박사에 임명되고 1536년(중종 31)에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지평(持平)·사간(司諫)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그 후 상호군(上護軍)과 황해도관찰사, 1550년(명종 5)에 전라도관찰사, 다음해에 한성부윤이 되고 1552년 (명종 7)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불취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전직되었다.
그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직시 백성을 다스리며 실천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첫째, 옛 폐단을 고쳐 정사를 새롭게 하고 둘째,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낭비를 없애고 절약하였으며 셋째, 백성을 사랑하고 송사는 명철하게 판단처리 하였다.
그가 1546년(명종 원년)에 병을 얻어 이임하니 그에 대한 고을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담아 비를 세웠다. 비문 끝절에 "공경하도다 공이여 우리 향토에 사랑을 주시었도다. 우리는 돌에 글로 새겨 영세토록 잊지 않으려고 명종 2년 정월에 이 비를 세우노라"고 기록하였다.
厚
이 묘(墓)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참봉공파조( 奉公派祖)인 진사 남궁후(厚)와 배위 공인전의이씨(恭人全義李氏)의 유택이다. 남궁후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고창공(高敞公) 남궁필(弼)의 둘째 아들로 1502년(연산군 8)에 출생하였으며 함열남궁씨의 7파조 중 참봉공파조이다.
한때 진사의 직에 나갔으나 관직이 없고 오로지 학문을 숭상하고 즐기며 후진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참봉의 직을 내렸으나 끝내 하지 않았으며 다만 고고한 선비로 살다가 향년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전의이씨이며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통덕랑 저(著), 차남은 경상도 도사·사성 지(芷), 삼남은 참봉을 지낸 무(茂)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憘
이 묘(墓)는 조선조때 교리(校理)를 역임한 남궁희(憘)와 배위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를 합봉한 유택이다.
남궁희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자 현령 남궁익(南宮翼)의 장남으로 1510년(중종 5)에 출생했다. 자는 구중(懼仲)이며 함열남궁씨 7파조 중 교리공파조(校理公派祖)이다.
30세에 초시를 거쳐 진사(進士)에 오르고 3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예문관검열, 대교, 홍문관 수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은퇴하고 1595년(선조 30)에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청풍군수 활(活)을 두었다. 묘는 선고(先考)의 묘 아래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이 묘는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한 남궁침( )과 배위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유택이다. 남궁침은 자가 성중(誠仲)이며 본관은 함열(咸悅)로 1513(중종 8)에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관찰사 찬(璨)의 손자이며 현령 익(翼)의 차남으로 출생 대사성공파의 파조이다.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고 1544년(중종 39)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48년(명종 3) 이조좌랑, 다음해 사인이 되고 1552년 경상도 암행어사·직제학·우부승지, 다음해에 좌승지를 지내고, 1557년(명종 12)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후 판결사(判決事),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564년 전라도 관찰사·형조참판·함경도 관찰사, 1566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슬하에는 직장 길( ), 영광군수 견( ),직장 식(湜), 건( ), 가선대부 도지중추부사 영(泳) 등 5형제를 두었다. 묘는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와 합봉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愷
이 묘는 통훈대부 지평현감을 역임한 남궁기(愷)와 배 숙인(淑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유택이다.
남궁기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현령공(縣令公) 남궁익(南宮翼)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낙중(樂仲),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1517년(중종 12)에 출생했고, 함열남궁씨 7파조 중 지평공파조(砥平公派祖)이다. 23세때 과거에 등과하여 생원 진사에 오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현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인 전주이씨이며 슬하에 통덕랑 도(渡), 예부생원 준(濬), 무관 만호 판관 섭(涉)의 3형제를 두었다.
묘는 합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悌
이 묘는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김천군수·배천군수·연안부사를 역임한 죽계(竹溪) 남궁제(梯)와 배 숙부인(淑夫人)풍천임씨(豊川任氏)의 유택이다. 남궁제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 숙(淑)의 아들로 1543년(중종 38)에 출생했다. 자는 중우(仲友),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함열이다. 함열남궁씨의 7파조중 연안공파조(延安公派祖)이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 급제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1572(선조 5) 평강현령, 진감현감, 의령어사를 지내는 동안 치적이 있어 왕으로부터 "거관근검부역평균(居官勤儉賦役平均)"이라는 여덟자를 포상받았다. 그 후 사섬시정을 거쳐 김천·백천군수, 평산·연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전조사(轉漕使)로서 군수물자 수송에 공을 세웠다.
슬하에는 장남 계공랑 행(荇) 차남 사무음사 명(蓂), 3남 함경순변사 헌(憲),4남은 주부 협(莢)을 두고 묘는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恢
이 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남궁회(恢)의 유택이다.
남궁회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숙(淑)의 아들로 1546년(명종 1)에 출생하였다. 자는 군곽(君廓)이며 8세에 선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관직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학문연마에만 전념하였고 효심 또한 극진하였다.
높은 경륜과 덕망을 인정받아 교관에 임명하였으나 수락하지 않았고 다시 금오랑(金吾郞)에 명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어머님을 모시고 강원도 홍천군 월운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이며 묘는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발(發), 진(盡), 급( )의 3형제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추모향사를 지낸다.
崇
세보(世譜) 18세. 호(號)가 모현재(慕賢齋)로 습독공(習讀公)의 4자(四子)로 태어나셨으며 모현공파(慕賢公派)의 파조이시다.
위로 세 분의 형님이 계셨으나 모두 후손이 끊어지고 공만이 습독공의 후사(后嗣)를 이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크게 번창하였다.
1975년 병진대보(丙辰大譜) 수보(修譜) 때 처음으로 공의 후손을 모현공파로 분리하여 공이 파조(派祖)가 되셨으며 우리 남궁씨(南宮氏)는 6파에서 7파로 늘어났다.
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만세곡(萬世谷) 선영국 내에 단비(壇碑)를 모셔 치제(致祭)하고 있다.
근세 인물 .
한서(翰西) 남궁억은 구한말(舊韓末) 기울어가는 국운을 세워보려고 관계에서 정계에서 또한 언론계에서 정열을 바쳐 싸웠고 종교·교육 및 비밀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다.
1863년 12월 27일 한성 왜송골에서 출생하였으며 호(號)는 한서(翰西)로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사숙한학(私塾漢學)을 수학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20세때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후 내부주사(內府主事)로 임관되어 고종황제의 어전통역(御前通譯)으로 활동하고 1887년 영국·독일·러시아 등 외국순방에 참여하였으며 1889년 궁내부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어 4년간 고종황제를 시봉하였다.
칠곡부사로 임명되었다가 1896년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한 독립협회 수석총무와 서법요원이 되어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우고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하여 대역부도 죄로 몰아 남궁억, 이상재, 방한덕 등 18명을 투옥하였다. 얼마 후 고종의 특별은사령(特別恩赦令)으로 석방되었으나 1898년 독립협회는 종말을 고하고, 동년 9월 5일 윤치호, 장지연, 이상재, 라수연 등과 손을 잡고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일간신문으로 발행하였다.
남궁억 무궁화
시비(南宮檍 無窮花詩碑)
이 시비(詩碑)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한서(翰西) 남궁억(檍)의 무궁화시비이다.
남궁억은 시조 원청(元淸)의 30세손으로 중추도사 영(泳)과 배(配) 덕수이씨와의 12남매 중 외아들로 1863년(철종14)에 출생했다.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는 한서(翰西)이다. 20세때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22세에 고종황제의 통역관이 되어 다재다능(多才多能)한 능력이 인정되어 23세에 내부주사의 관직을 받아 칠곡부사·성주목사·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내부토목국장때에는 정동 육조와 남대문사이 광화문길을 확장하고 파고다공원을 만드는 등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총무직을 맡아 독립신문 발간·독립문 건립·황성신문 창간 무궁화의 국화지정에 힘썼다. 1933년 무궁화당 사건으로 투옥, 1939년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일가들이 정성을 모아 무궁화노래를 새겨 독립기념관에 시비를 세웠다. 그 때가 1988년이며 자녀는 초대뉴욕총영사 염(炎)과 2녀를 두었다.
그의 업적을 보면 첫째, 황성신문사장·광동학회장 등 언론활동을 하였고 둘째, 무궁화를 국화로 제정하고 무궁화자수본 등으로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셋째, 양양현산학교와 홍천모곡학교를 창립하고 배화학당(현 배화여고)과 상동청년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넷째, 서예의 대가(大家)로 궁체를 보급하고 다섯째,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차례 투옥생활을 하였고 여섯째, 저서로는 동사략·조선이야기·가정교육 등 10여편과 무궁화노래·기러기노래·일하러가세 등 많은 노래를 지어 보급하였다.
구한말 5대 시인 휘 벽(壁)
公은 세보상(世譜上) 32世이며 대사성공(大司成公) 무편(戊編)에 속(屬)한다. 號는 초몽(草夢)이고 인천 강화(江華)에서 아버지 훈(薰)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一男一女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였다. 1894年에서 1921年 까지 시인(詩人)으로서 짧은 삶을 살았다.
1912年 서울 한성고등보통학교(漢城高普)를 졸업(卒業)하고 오산중학교 교사(敎師)로 잠시 재직(在職)하였다.
그 뒤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협회(東京音樂協會) 간사(幹事)로도 있었으며,1920年에 창간(創刊)된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변 영로(卞 榮魯), 오 상순(吳 相淳), 염 상섭(廉 想涉) 等과 교분(交分)하던 구한말(舊韓末) 5大 시인(詩人)으로 꼽히는 천재(天材)이기도 하나 너무 짧은 생애(生涯)가 가슴아프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彊會月報) 1907年 1월號에 투고(投稿)하였던 애국설(愛國設)에서 당시(當時) 지도층(指導層)의 각성(覺醒)과 청소년교육(靑小年敎育)의 중요성(重要性)을 촉구(觸具)하기도 하였다.
작품 활동(作品 活動)은 主로 "청춘"과 "폐허" 및 "조선일보" 일본잡지인 "태양"을 중심(中心)으로 전개(展介) 되었는데, 일어(日語) 및 영어(英語)로 된 시(詩)와 수필(隨筆)도 있다. 1918年 "청춘"에 "孤獨은 너의 運命이다" 等 5篇의 일문시(日文詩)와 "나의 세상" "나의 사랑" 等 2篇의 영문시(英文詩)가, "폐허(閉墟)"에는 수상(隨想) "자연(自然)"(1920), "풀"(1921), "생명의 비의(生命의 秘義)"(1921) 등 4篇의 詩, 조선일보(朝鮮日報)에는 "신비의 인연(神秘의 因緣)", "출생(出生)" 等 7篇의 詩가, 1922年 "신생활"에는 "별의 아픔", "마(馬)" 等 5篇의 유고시 및 일기(日記)가 실려있다. 27歲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작품 수(作品 數)가 극히 한정(限定)되어 있으나, 얼마 남기지 못한 유작(遺作)들은 한국근대(韓國近代) 시사(詩史)에서 특이(特而)한 시세계(詩世界)를 보이고 있다. 卽, 유년기(幼年期)의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관념(觀念)과 초기시(初期詩)에서 보이는 미(美)와 우주적(宇宙的) 조화(調和)를 포함한 다양성(多樣性), 그리고 "폐허"지로 부터 본격화(本格化)한 시작(詩作)들이 지니는 사상(思想)이 시적(詩的) 특색(特色)이 되고 있다.
그의 문학(文學)은 당시(當時) 우리 문단(文壇)에 만연(蔓延)되고 있었던 병인적(病因的) 퇴폐성(退閉性)이나 감상(感想)에 물들지 않고, 그 나름대로 자연(自然)의 순실미(純實美)와 ‘생명의 비의’와 대지사상 等을 추구(追求)한 것 等을 특색(特色)으로 들 수 있다.
단학자(丹學者) 諱 두(斗)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고려벽상공신(高麗壁上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역임(歷任)하신 諱 신(信)公의 9代孫이시고 간성공(杆城公)의 5대손(五代孫)이시다. 中宗 十一年(1526年)에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에서 아버지 諱 집(緝)公의 長男으로 비 교적(比較的) 부유(富裕)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1555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給第)하여 진사(進士)가 되tl고 그의 비범(非凡)한 재주와 문장(文章)이 성균관(成均館)에 까지 명성 (名聲)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그의 詩를 즐겨 외웠다.
公은 서울로 집을 옮기고 시골에는 첩(妾) 한 사람을 두어 매년(每年) 추수(秋收)를 하여 올려가곤 하였는데 妾은 절세미모(絶世美貌)에다 재주까지 비범(非凡)하여 그림과 글씨에 무불능통(無不能通)하니 公께서 지극(至極)히 총애(寵愛)하셨다. 그러나 妾이 이성(異姓)의 조 카와 간통(姦通)하는 것을 목격(目擊)하고 두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인 後 금대산(金臺山)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에 머물다가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의령야암(宜寧野菴)이라는 암자(庵子)에 머물게 되었다.그러던 어느날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도교(道敎)의 방술(方術)이 뛰어난 노승(老僧)이 무주(茂州) 치상산(稚裳山)의 어느 암자(庵子)에 기거(起居) 한다는 소식(所息)을 접(接)하시고 무주(茂州)에 있는 치상산(稚裳山)으로 찾아가서 그 노승(老僧)을 만나 신선술(神仙術) 수련(修練)에 입문(入門)하게 되었다. 수련과정(修練過程)은 정신통일(精神統一)을 위하여 잠 안자는 法과 곡기(穀氣)를 끊는 法을 익히고 이를 응용(應用)하여 내단수련(內丹修練)의 극치(極致)인 신태(神胎) 일보직전(一步直前)까지 도달(到達)하였다고 한다.
한 때는 오성(鰲城) 이 항복(李 恒福)이 젊었을 때 80이 넘은 公을 만나 감탄(感歎)하며 “선생(先生)께서는 90이 다 되셨는데도 정력(精力)이 젊은 사람 같으니 어떤 비방(秘方)을 쓰십니까”라고 질문(質問) 하였다고 류 광익(柳 光翼)의 저서(著書)인 사암집화(私岩輯話)에 소개(紹介)되기도 한다.이 수광(李 수光)은 그의 저서(著書)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소개(紹介)하기를 "언제나 명산 대천(名山 大川)을 떠 돌아다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가히 지선(地仙 : 땅위에 사는 神仙)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는 뛰어난 단학자(丹學者)로서 신선술(神仙術)의 대가(大家)이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위험(危險)에 처하여 피신(避身)한 젊은 충무공(忠武公) 이 순신(李 舜臣)을 만나 자식같이 돌보며 심신(心身)의 연마(硏摩)와 무예(武藝)를 가르쳐 후일(後日) 구국(求國)의 명장(名將)으로 왜적(倭敵)으로부터 조선(朝鮮)의 바다를 지켜 나라를 求하게 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조선 중기(朝鮮 中期)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때의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 두 선생전"은 "홍길동전"과 함께 쌍벽(雙壁)을 이루는 소설(小說)이다. 슬하(膝下)에 외아들 인(引)을 두었으나 불행(不幸)하게도 그 後에 기록(記錄)이 없어 아쉬움을 금(禁)치 못한다.
주: 참고문헌(參考文獻)으로는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과 신선단학(神仙丹學), 류 광익(柳 光翼)이 지은 사암집(私岩輯)과 류 몽인(柳 夢寅)이 지은 야담선도부(野談仙道部)가 있다.
해운과 조선의 대부 련(鍊)
남궁이 해냈어!
6.25 전쟁(戰爭) 中이던 1952年 10月 21日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임시(臨時) 수도(首都) 부산(釜山)에서는 감격적(感激的)인 사건(事件)이 벌어졌다.
1만 680톤 중량(重量)의 한국(韓國) 국적(國籍) 화물선(貨物船) 미스코리아號가 미국 서해안(美國 西海岸)의 포틀랜드港을 向하여 부산항(釜山港) 제 1 부두를 출항(出航)하는 일이다.
출항식(出航式)에 참석(參席)한 리 승만(李 承晩) 대통령(大統領)은 테이프를 끊기 전에 선내(船內)를 둘러보면서 박 옥규 선장(後에 海軍參模總長 歷任) 이하(以下) 항해사(航海士)와 기관사(機關士)들에게 흥분(興奮)된 어조(語調)로 “자네들, 이 배를 몰고 정말 미국(美國)에 갔다 올 수 있나?” 라고 물었다. “각하(閣下), 염려(念慮)하지 마십시오. 자신(自信) 있습니다.” 선장(船長)은 힘차게 대답했다. 李 大統領은 매우 흐뭇한 표정(表情)으로 일일이 선원(船員)들의 등을 두들겨 주며 격려(激勵)하였다.
李 大統領으로서는 일만톤급 한국(韓國) 국적(國籍)의 화물선(貨物船)이 가득히 고철(古鐵)을 싣고 대미(對美) 항로(航路)에 취항(就航)하는 것이 여간(如干) 대견스럽지 않았다. 대통령(大統領)은 큰 목소리로 “南宮이가 해냈어! 기어이 해냈어!” 라고 감격(感激)에 벅찬 말을 연발(連發)하였다. 大統領의 얼굴은 상기(上氣)되었고 더욱 흥분(興奮)되었다. 이 날의 주인공(主人公) 미스코리아 號의 선주(船主)는 극동해운㈜의 사장(社長), 38歲, 신장 180㎝의 당당한 체구(體驅)의 미남청년(美男靑年) 일본대 경제학부(經濟學部)를 졸업한 남궁 련(南宮 鍊)이었다. 당시(當時)에는 1만톤급 대형 화물선(大形 化物船)의 보유(保有) 국가(國家)가 다섯 나라도 안되었으며 일본(日本)도 갖지 못한 상태(狀態)였다.
1946年에 극동기업㈜을 출발(出發)로 사업(事業)을 시작(始作)하고 1949年에 극동해운㈜을 설립(設立)하여 3年 後에 이런 위대(偉大)한 일을 해내었으니 참으로 어른의 안목과 능력은 경이로운 바 있다. 그 후 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우리 나라 해운의 종가격인 대한해운공사의 사장(社長)으로 한국(韓國) 해운(海運)의 개척자(開拓者)의 자리에 당당히 임하게 되었다. 1958년 한국석유㈜를 설립(設立) 정부(政府)의 요청(要請)으로 울산에다 석유화학단지(石油化學團地) 건설(建設)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樹立)하고 대규모(大規模) 정유공장(精油工場)을 건설(建設)하기 위한 교섭차(交涉此) 도미(渡美)하였는데 4.19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좌절(挫折)의 큰 아픔을 안게 되었다.
5.16 이후에는 한국경제인협회(全經聯의 前身) 부회장(副會長)으로 군사 정부(軍事 政府)의 경제개발정책(經濟開發政策)에 적극(積極) 참여(參與)하고 한국종합제철㈜ 이사, 경제심의회 의원, 금융통화위원으로 활약(活躍)하면서 울산을 공업기지(工業基地)로 선정(選定)하는 많은 아이디어를 창출(創出)하여 제공(提供)하였다. 1968년에는 박대통령의 요청(要請)으로 노사 분규(勞使 紛糾)와 적자경영(赤子經營)으로 파산(破産) 직전(直前)인 대한조선공사를 인수(引受)하여 20년간 사장, 회장을 역임(歷任)하였으며 1973년에 온 재산(財産)을 투입(投入)하여 옥포에 조선소(造船所)를 건설(建設)하여 박대통령 임석하(臨席下)에 발주식(發注式)을 거행(擧行)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세계적 규모(世界的 規模)의 시각(視覺)을 가진 기업인(企業人)이었으며 한국(韓國)의 기적(奇蹟)은 곧 우리 해운(海運)과 조선(造船)에 의해 선도(先導)되었다 해도 결코 과언(過言)이 아니다. 바다와 함께 배와 함께 오로지 나라의 경제 재건(經濟 再建)을 위해 한 평생(平生)을 다 바치신 거인(巨人)이요, 자랑스러운 남궁(南宮)의 후손(後孫)이다.
그냥 좋아서
특기(特記)해야 할 일은 취미(趣味)로 즐겨 하셨던 컬렉션 이야기다. 고미술(古美術)에 관심(關心)을 가지시고 그냥 좋아서 모은 것이라는데 소장(所藏)한 것이 무려 3,000점이나 된다는 사실(事實)이다. 그 중에는 불상(佛象), 금관(金冠), 금채도기(金彩陶器) 등 진귀(眞貴)한 것들이 많고 국보(國寶)로 지정(指정)된 것, 국보급(國寶級), 보물급(寶物級)에 비견(比肩)할 만한 것이 상당수(相當數)이다. 또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 유물(遺物)이 800여점, 수백점의 탈 등 재미있는 물건(物件)과 대단한 物件들이 고루 있어 한국미술사(韓國美術史)를 바꾸어 놓을 만큼 귀중(貴重)한 것들이라는 중평(重評)이다.
代를 이은 종사(宗事)에 헌신(獻身)
27世 諱 복의 3男 1女 중 3男으로 1915年에 양주(陽州) 루원(樓院 : 現 방학동)에서 출생(出生)하였으며 호(號)는 강석(江石)이시고 항렬(行列)은 28世 윗 금(金)이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종사(宗事)를 도우셨다.
노중련(魯仲連) 諱 흔(炘)
公께서는 선조(宣祖) 38年(1605年)에 아버지 諱 부와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4男 1女 中 4男으로 출생(出生)하시었고, 중부(仲父)이시며 통정대부 음사(通政大夫 蔭仕),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돈녕부 직장(敦寧府 直長), 무주현감(茂州縣監)을 지내신 諱 격(格)公에게 입양(入養)되어 교리공(校理公) 병편(丙編) 21世로 代를 이으셨다.
字는 회이(晦而)이시고 관직(官職)은 통사랑(通仕郞)에 올랐으며 덕행(德行)과 학문(學文)이 뛰어나 칭송(稱頌)을 받았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因)하여 인조(仁祖) 임금이 삼전도(三田度 : 지금의 송파)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무릎 꿇고 항복(降伏)하는 것을 보고 비분애통(비분애통)하시고 한비(汗碑 :오랑캐의 碑石)가 세워지니 그 땅을 더럽게 여겨 105결(結: 30萬坪)의 토지(土地)의 재산권(財産權=文書)을 불사르고 다시는 자기 소유(所有)로 삼지 않았으며 생각하지도 않고 의연(毅然)히 강원도 홍천 모곡으로 은거(隱居)하여 한 生을 마감하시니 세인(世人)들은 그를 칭송(稱頌)하여 노중련(魯仲連 :魯나라의 學者)과 같은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배위(配位)는 현풍 곽씨(玄豊 郭氏)와 장수 황씨(長水 黃氏)사이에서 3男 5女를 두시니 長男은 장연부사(長淵府사) 諱 후, 次男은 諱 무, 3男은 諱 서 이며 5女는 이 지학(李 志學), 신 준(申 準), 강 여위(康 汝衛), 윤 익준(尹 益雋), 윤 흥일(尹 興一)이다. 효종(孝宗) 7년(1656年)에 향년(享年) 52歲로 타계(他界)하셨다. 墓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동막골 선영하(先塋下) 亥坐에 모시었다.
근세 분야별 인물 .
호씨는 아버지 엽(燁)님과 어머니 류씨의 3남중 장남으로 1931년 가평군 청평에서 출생. 세보상으로 32세(참.을)에 속한다.완(琓)씨는 아버지 항(항)씨와 어머니 경주인 김오순씨의 5남중 차남으로 1933년 가평군 청평에서 출생. 세보상으로 같은 32세 (참.을)에 속한다.
두사람은 한 마을에 살면서 1950년 6.25가 발발되어 국군이 남하하니 고향 청평은 공산 치하에 있게 되었다. 이에 비분강개하여 15명의 동지들이 모여 뜻을 같이 하기로 결의 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결사 항전 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들은 수차례 모의하고 투쟁을 개시하려고 일어서다 내무서원에게 발각되어 납북의 길에 오르게 되었으나 그 중 두명은 도망하여 살았고 나머지 13명은 북으로 간 뒤 55년이 지나도록 생사를 알 수 없다. 가평군의 뜻있는 분들이 마음을 모아 이들의 애국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청평초등학교 교정에 장의탑을 세웠다.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빈다.
아버지 삭(삭)씨와 어머니 금성 나씨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1933년 1 22일 충남 부여에서 출생. 6.25 발발과 함께 군에 입대하여 참전하게 되었으나 전사하였다. 이의 장렬한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강경 미륵사에는 수길씨의 위령탑이 세워졌다. 세보상으로는 32세(대.병)에 속한다.
아버지 열(烈)씨와 어머니 파평 윤씨와의 4남 3녀중 차남으로 1924년 7월15일 충남 부여에서 출생. 6.25전쟁에 종군하여 전란중에 실종 되었으나 그의 용감한 전력을 기록하여 부여 부소산에 위령탑을 건립하여 추념하고 있다. 세보상으로 32세(대.병)에 속한다.
현대 인물 .
남궁연(南宮鍊, 1915 ~ 2002 11.30)
기업인으로,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의 초대 사장을 역임
1. 생애
- 1915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
- 일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함
-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 관리로 일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교 통부 해운국 과장, 상공부 수산국장 등을 역임
- 1950년 1월에는 자본금 3억 원으로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 취임
- 1969년에는 국내 최초로 수출선을 건조했고, 1974년에는 미국 걸프사로부터 발주 받아 국 내 최초로 대형 유조선을 건조
- 1979년에는 대한조선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중공업 사장, 한국석유개발공사 사장 등을 역임
- 2002년 11월 30일 향년 87세로 별세
2. 업적
- 남궁연은 대한조선공사를 이끌며 대한민국 조선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
- 그의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 조선업 시장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 남궁연은 조선업뿐만 아니라 중공업, 석유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약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3. 평가
- 남궁연은 대한민국 조선업의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업인 중 하나로 꼽히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으로, 메트로신문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1. 출생
- 생년월일: 194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2. 학력
- 연세대학교 졸업
3. 경력
- 2005년부터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회장
-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사장
- 2002년 브이오엔 대표이사 회장
- 1985년 정보산업협회 부회장
- 1976년 포철기업 사장
4. 수상 - 2013년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특별상
- 2012년 제19회 장한 고대언론인상
- 2011년 제48회 한국출판문화상 대상
5. 저서
- <메트로신문사 사장 남궁호의 경영 에세이> (2006년, 에세이퍼블리싱)
6. 기타
- 남궁호는 메트로신문사를 창간하여 10여 년간 이끌어오면서, 신문사의 발전과 함께 대한 민국 언론계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 그는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브이오엔, 정보산업협회, 포철기업 등 다양한 기업에서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였다.
- 남궁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라는 책을 출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경영에 대한 조언과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다.
남궁호는 대한민국의 언론과 기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업적과 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남궁현(南宮炫, 1912년 ~ 1986년)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
1. 출생
- 1912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출생.
- 서울 철도중학교를 졸업.
2. 정치 경력
- 1945년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여군 위원장, 조선민족청년단 부여군 단장을 지냈다.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 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1948년 8월 7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 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지만 신병으로 인해 출마하지 못했다.
3. 사망
- 1986년 11월 24일 사망
남궁현은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남궁석(南宮晳, 1938.02.28 ~ 2009.01.16)
공무원 출신 기업인
1. 출생
- 1938년 2월 28일, 경기도 용인
2. 학력
- 선린상업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 경력
- 중앙일보 입사, 동양방송 기획실장 등 역임
- 1975년 삼성전자 기획조정실장
- 1982년 사표 제출 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공부
- 1986년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근무
-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 PC통신(현 KT알파) 초대 사장
- 1993년 삼성그룹으로 돌아와 삼성SDS 사장
- 1998년 말부터 2000년 초까지 정보통신부 장관
-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용인시 갑 선거구에 출마 남궁석은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IT 산업 육성과 정보화 사회
구현에 기여하였으며, 삼성SDS 사장 시절에는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남궁진(南宮鎭, 1942년 12월 20일 ~)
정치인
1. 출생
- 1942년 12월 20일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교촌리
2. 학력
- 서울 중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3. 경력
-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추진 협의회에서 활동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선거대책 본부 부대변인 역임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광명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 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
- 1997년 새 천년민주당 창당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
- 1998년 대통령 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임명
- 2000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2002년까지 재직
- 새 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열린우리당 고문 등 역임
남궁진은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특히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문화 예술과 관광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교육학자
1. 출생
- 1949년 9월 15일,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2. 학력
- 중앙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
3. 경력
- 관동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 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역임
4. 저서
- 교육의 역사 철학적 기초
- 교육학 총론
- 한국 개화기의 사회교육 연구
- 일제 침탈기의 민족 사회교육 연구
남궁용권은 교육학자로서 교육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한국의 사회교육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산부인과 의사
1. 출생
- 1956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
2. 학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석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박사
3. 경력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과장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의무부총장 겸 의무원장
경제 관료 출신
1. 출생
- 1951년 서울
2. 학력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 행정고시 10회로 공직에 입문
3. 경력
- 재정경제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 등을 추진하여 경제 안정화에 기여했다.
- 기획예산처에서는 예산총괄심의관과 재정기획국장 등을 역임하며 국가 재정의 효율적인 운용과 투명성 제고에 기여했다.
- 예금보험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부실 금융기관 정리와 공적자금 회수 등을 통해 예 금자 보호와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했다.
- 금융통화위원으로 활동하며 통화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참여했다.
남궁훈은 공직 생활 동안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쌓아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기업인으로, 아이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와 재단법인 게임인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1. 출생
- 1962년생
2.학력
- 서강대학교를 졸업
3.경력
- 카카오의 공동창업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 카카오게임즈의 대표이사를 거쳐 2022년 3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카카오의 대표이사를 역임하였다.
- 2023년 11월 아이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 2020년에는 제12회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게임산업 발전 유공 부문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 하였다.
게임인재단 이사장으로서 게임 산업의 발전과 게임 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게임 산업이 더욱 발전하고 건강한 게임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배우로 1999년 데뷔 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연 역할에 머무르며 무명의 시 절을 보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며 주연급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주연을 맡은 후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 '마이 시 크릿 호텔', '김과장', '스토브 리그', '검은 태양', '낮과 밤', '닥터 프리즈너', '365: 운명을 거 스르는 1년', '어느 날', '천원짜리 변호사' 등에 출연하며 주연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영화 '비정규직 특수 요원', '라이트 마이 파이어', '월색유인' 등에도 출연하며 스크린에서도 활약하였다.
2024년 제60회 백상예술대상 TV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고 2023년 MBC 연기대상 대상, 2023년 제36회 그리메상 최우수 연기자상, 2023년 제14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 총리 표창을 수상하였다.
남궁민은 연기력과 흥행력을 모두 갖춘 배우로 평가받으며, 대한민국의 대중문화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