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第 仁之本 家和萬事成
효와 공경은 인의 근본이고,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일을 이룬다.
근세 전 인물 .
啓
이 단은 조선조 좌명원종공신 자헌대부 한성부윤 충청전라병마도절제사 남궁계(啓)를 추모 제향하는 단이다.
남궁계(啓)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이며 소부윤(少府尹) 우(祐)의 아들로 조선조에 음보로 등용되어 사과를 지내고 1401년(태종 1) 좌명원종공신 3등이 되었다. 1431년에 대호군에 올랐고 1426년(세종 8) 정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판의주목사가 되고 1435년 동지중추원사에 올랐다.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38년 한성부윤에 오르고 1443년 전라도절제사 1445년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1446년(세종 28)에 세상을 떠나니 세종께서 크게 애통하여 승지를 보내 문상하고 예관을 보내 상수를 내려 호상케 하였다. 배는 정부인 능성구씨로 후사가 없어 남궁좌(佐)의 셋째 아들인 치(致)를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
묘가 실전되어 제를 드리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자손들이 정성을 모아 1962년 10월 15일에 단을 만들어 높은 은덕을 영원토록 기리게 되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하고 있다.
佐
이 묘는 사온서승(司署丞)을 거쳐 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를 역임한 남궁좌(佐)와 배(配)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유택이다.
남궁좌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으로 고조 신(信)은 고려국자감 진사로 충숙왕조에서 벽상1등공신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고, 증조 진(瑨)은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이고, 조부 기(起)는 민부상서(民部尙書) 집현전제학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복(福)은 사복시판사(司僕侍判事)이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가 사온서승을 거쳐 지간성군사를 지냈고 정(政)·효(效)·치(致) 3남을 두었는데 10촌 병사공 계(啓)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셋째 치(致)를 입양계승하여 그 손이 번성하니 오늘의 함열남궁씨를 이룩하였다.
불행하게도 장남 정(政)이 무자하고 차남 효(效)도 6대손에서 절손되었으므로 시묘봉양(侍墓奉養)치 못하게 되어 출계 후손이 정성껏 봉제 수호를 하고 있다. 묘는 쌍봉으로 해좌에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致
이 묘(墓)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역임하고 병조참의(兵曹議)에 증직된 남궁치(致)의 유택이다.
남궁치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시조 원청(元淸)의 14세손으로 간성군사 좌(佐)의 셋째 아들이나 태종때 좌명원종 공신에 책록되고 대호군에 올랐으며 전라도절제사를 지내고 중추원부사에 이른 계(啓)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박천군수에 올랐다. 중종반정으로 손자인 찬(璨)이 복권될 때 같이 통정대부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옥천김씨(沃川金氏)이며 사향(巳向)으로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이조참판 순(順)을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順
이 묘는 이조참판(吏曹判)에 증직된 남궁순(順)과 배(配) 증 정부인(貞夫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순은 시조 원청(元淸)의 15세손이며 군수(郡守) 치(致)의 아들로 세종조에 출생하여 사마시에 급제하고 예부생원(禮部生員)으로 청렴 결백한 선비로 고고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 남궁찬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복권되어 증직을 받을 때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배 철원최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다. 특히 정부인 최씨는 청빈한 가문을 지키며 유복자 찬(璨)을 정성으로 가르쳐 강직한 공인으로 바르게 살게 하였으며 남궁씨(南宮氏) 문중을 중흥시키는 중조로서 자손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다. 부인은 높은 벼슬로 출세하는 것보다 자손이 번성하기를 염원하더니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켜 외아들 찬(璨)이 4남을 두어 대를 이어 번성하게되니 오늘의 남궁(南宮)씨는 단본이며 모두 한 자손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璨
이 묘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호은(壺隱) 남궁찬(璨)의 유택이다. 남궁찬은 자가 숙헌(叔獻) 호는 호은(壺隱)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증 이조참판 순(順)의 아들로 1453년(단종 1)에 출생했다.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경상도 도사·제주목사·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 등 제현을 신구하려는 상소를 극간했다가 용안에 유배되고 1504년(연산 10)에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에 어울리게 삼사사관(三司四館)에서 국사에 임하였고 후손들은 청족(淸族)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맑은 그 삶을 본으로 하고 있다. 유배길에 지은 묵죽(墨竹)과 묵매(墨梅)의 시서는 대가를 이루었다.
왕명으로 오늘의 자리에 안장되었고 묘전의 문관석은 크기가 웅장하고 모양이 특이한데 그의 충의심에 감격한 명의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명나라에서 제작하여 왔다고 전한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재 격이다. 배 정부인 안동김씨는 무후하고 계배 정부인 평산신씨에게 4남을 두었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璨
이 비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오위도총관·행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남궁찬의 신도비이다.
이 비는 1957년 9월 국가에 남긴 공적과 충절의 정신을 길이 계승하기 위하여 후손들의 정성으로 건립하였다.
남궁찬(璨)은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중시조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빈하여 나라에는 충(忠)으로, 부모에게는 효(孝)로, 정사에는 의(義)로 임하였다.
호는 호은(壺隱)이고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전북 익산의 용안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필(弼)·익(翼)·숙(淑)·열(說)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평산 신씨
세보(世譜) 16세 부제학공(副提學公)의 배위(配位)이시다.
1457년(세조 3) 2월 27일에 출생하셨으며 아버지는 대사성(大司成) 자승(自繩)이시고 할아버지는 한림대제학(翰林大提學) 개( )이시며 외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시다.
슬하에 4남 필(弼), 익(翼), 숙(淑), 열(說)과 2녀를 두셨는데 장남 필(弼)은 고창현감(高敞縣監), 차남 익(翼)은 임피현령(臨陂縣令), 3남 숙(淑)은 한성판윤(韓城判尹), 4남 열(說)은 습독관(習讀官)으로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弼
이 묘는 조선 때 현감을 지낸 남궁필(弼)과 배 숙인(淑人) 강화최씨(江華崔氏)·배 숙인(淑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필은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의 17세손이자 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찬(璨)의 장남으로 1475년(성종 6)에 출생했다.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아버지 남궁찬이 연산군의 폭정을 상소하다가 익산시 용안(龍安)으로 유배되니 그 뒤를 따라가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인한 병이라 치유되지 못하고 상을 당하니 애통·비감해 하며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그 뒤로는 스스로 산수주인(山水主人)이라 칭하며 예·악을 즐기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중종반정으로 부친이 사면되면서 고창현감의 관직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가숙제의도(家塾祭儀圖)』가 있다. 묘는 강화최씨와 합봉하였고 철원최씨는 왼쪽에 쌍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翼
이 묘는 통훈대부 임피현령을 역임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判)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된 남궁익(翼)과 배위 정부인 연안김씨의 유택이다. 남궁익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으로 부제학 찬(瓚)의 둘째 아들이며 1480년(성종11)에 출생하였고 호는 익지(翼之),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선친의 유언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40세에 음보로 관직에 나가 한성부 랑관, 수운판관, 동복현감, 임피현령을 지냈으며 부친 찬(瓚)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증직될 때 그도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슬하에는 교리 희(憘), 자헌대부 한성판윤 침(沈), 지평현감 기(愷)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淑
이 묘는 한성판윤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남궁숙(淑)과 배 정부인 완산이씨와 계배 정부인 고흥류씨와 삼합봉(三合封)이다.
남궁숙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이자 부제학 남궁찬(璨)의 셋째 아들로 1490년(성종 21)에 출생했다. 자는 숙부(淑夫), 본관은 함열로 선친의 억울한 죽음에 비분절통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형인 필(弼)과 익(翼)의 권유를 받아 1528년(중종 23) 뒤늦게 생원이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안산군수·성주목사에 이어 홍문관부정자·지평(持平)·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상호군(上護軍)·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한성부우윤·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동지 중추부사에 올랐다.
안산군수·성주목사 재임시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생활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슬하에는 연안부사 제(悌)와 승지 회(恢)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후손들이 추모 향사를 지낸다.
淑
이 신도비는 정헌대부 한성판윤을 역임한 남궁숙(淑)의 신도비이다. 남궁숙(淑)은 자가 숙부(叔夫)이고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부제학 남궁찬(璨)의 아들로 1528년(중종 23)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1536년 홍문관 부정자에 이어 지평·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가 되었다.
황해도·전라도·함경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정헌대부,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이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영을 위로하는 뜻으로 성심을 모아 1982년 비를 세웠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淑
이 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남궁숙(淑)의 선정비로 고을 백성 등을 위해 많은 치적선정을 하여 1547년(명종 2)에 건립하였다.
남궁숙(淑)은 자는 숙부(淑夫)이며 강원도관찰사 남궁찬(璨)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에 생원(生員)이 되고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박사에 임명되고 1536년(중종 31)에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지평(持平)·사간(司諫)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그 후 상호군(上護軍)과 황해도관찰사, 1550년(명종 5)에 전라도관찰사, 다음해에 한성부윤이 되고 1552년 (명종 7)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불취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전직되었다.
그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직시 백성을 다스리며 실천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첫째, 옛 폐단을 고쳐 정사를 새롭게 하고 둘째,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낭비를 없애고 절약하였으며 셋째, 백성을 사랑하고 송사는 명철하게 판단처리 하였다.
그가 1546년(명종 원년)에 병을 얻어 이임하니 그에 대한 고을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담아 비를 세웠다. 비문 끝절에 "공경하도다 공이여 우리 향토에 사랑을 주시었도다. 우리는 돌에 글로 새겨 영세토록 잊지 않으려고 명종 2년 정월에 이 비를 세우노라"고 기록하였다.
厚
이 묘(墓)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참봉공파조( 奉公派祖)인 진사 남궁후(厚)와 배위 공인전의이씨(恭人全義李氏)의 유택이다. 남궁후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고창공(高敞公) 남궁필(弼)의 둘째 아들로 1502년(연산군 8)에 출생하였으며 함열남궁씨의 7파조 중 참봉공파조이다.
한때 진사의 직에 나갔으나 관직이 없고 오로지 학문을 숭상하고 즐기며 후진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참봉의 직을 내렸으나 끝내 하지 않았으며 다만 고고한 선비로 살다가 향년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전의이씨이며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통덕랑 저(著), 차남은 경상도 도사·사성 지(芷), 삼남은 참봉을 지낸 무(茂)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憘
이 묘(墓)는 조선조때 교리(校理)를 역임한 남궁희(憘)와 배위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를 합봉한 유택이다.
남궁희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자 현령 남궁익(南宮翼)의 장남으로 1510년(중종 5)에 출생했다. 자는 구중(懼仲)이며 함열남궁씨 7파조 중 교리공파조(校理公派祖)이다.
30세에 초시를 거쳐 진사(進士)에 오르고 3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예문관검열, 대교, 홍문관 수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은퇴하고 1595년(선조 30)에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청풍군수 활(活)을 두었다. 묘는 선고(先考)의 묘 아래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5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이 묘는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한 남궁침( )과 배위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유택이다. 남궁침은 자가 성중(誠仲)이며 본관은 함열(咸悅)로 1513(중종 8)에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관찰사 찬(璨)의 손자이며 현령 익(翼)의 차남으로 출생 대사성공파의 파조이다.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고 1544년(중종 39)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48년(명종 3) 이조좌랑, 다음해 사인이 되고 1552년 경상도 암행어사·직제학·우부승지, 다음해에 좌승지를 지내고, 1557년(명종 12)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후 판결사(判決事),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564년 전라도 관찰사·형조참판·함경도 관찰사, 1566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슬하에는 직장 길( ), 영광군수 견( ),직장 식(湜), 건( ), 가선대부 도지중추부사 영(泳) 등 5형제를 두었다. 묘는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와 합봉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愷
이 묘는 통훈대부 지평현감을 역임한 남궁기(愷)와 배 숙인(淑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유택이다.
남궁기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현령공(縣令公) 남궁익(南宮翼)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낙중(樂仲),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1517년(중종 12)에 출생했고, 함열남궁씨 7파조 중 지평공파조(砥平公派祖)이다. 23세때 과거에 등과하여 생원 진사에 오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현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인 전주이씨이며 슬하에 통덕랑 도(渡), 예부생원 준(濬), 무관 만호 판관 섭(涉)의 3형제를 두었다.
묘는 합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悌
이 묘는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김천군수·배천군수·연안부사를 역임한 죽계(竹溪) 남궁제(梯)와 배 숙부인(淑夫人)풍천임씨(豊川任氏)의 유택이다. 남궁제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 숙(淑)의 아들로 1543년(중종 38)에 출생했다. 자는 중우(仲友),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함열이다. 함열남궁씨의 7파조중 연안공파조(延安公派祖)이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 급제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1572(선조 5) 평강현령, 진감현감, 의령어사를 지내는 동안 치적이 있어 왕으로부터 "거관근검부역평균(居官勤儉賦役平均)"이라는 여덟자를 포상받았다. 그 후 사섬시정을 거쳐 김천·백천군수, 평산·연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전조사(轉漕使)로서 군수물자 수송에 공을 세웠다.
슬하에는 장남 계공랑 행(荇) 차남 사무음사 명(蓂), 3남 함경순변사 헌(憲),4남은 주부 협(莢)을 두고 묘는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恢
이 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남궁회(恢)의 유택이다.
남궁회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숙(淑)의 아들로 1546년(명종 1)에 출생하였다. 자는 군곽(君廓)이며 8세에 선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관직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학문연마에만 전념하였고 효심 또한 극진하였다.
높은 경륜과 덕망을 인정받아 교관에 임명하였으나 수락하지 않았고 다시 금오랑(金吾郞)에 명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어머님을 모시고 강원도 홍천군 월운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이며 묘는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발(發), 진(盡), 급( )의 3형제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추모향사를 지낸다.
崇
세보(世譜) 18세. 호(號)가 모현재(慕賢齋)로 습독공(習讀公)의 4자(四子)로 태어나셨으며 모현공파(慕賢公派)의 파조이시다.
위로 세 분의 형님이 계셨으나 모두 후손이 끊어지고 공만이 습독공의 후사(后嗣)를 이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크게 번창하였다.
1975년 병진대보(丙辰大譜) 수보(修譜) 때 처음으로 공의 후손을 모현공파로 분리하여 공이 파조(派祖)가 되셨으며 우리 남궁씨(南宮氏)는 6파에서 7파로 늘어났다.
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만세곡(萬世谷) 선영국 내에 단비(壇碑)를 모셔 치제(致祭)하고 있다.
근세 인물 .
한서(翰西) 남궁억은 구한말(舊韓末) 기울어가는 국운을 세워보려고 관계에서 정계에서 또한 언론계에서 정열을 바쳐 싸웠고 종교·교육 및 비밀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다.
1863년 12월 27일 한성 왜송골에서 출생하였으며 호(號)는 한서(翰西)로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사숙한학(私塾漢學)을 수학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20세때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후 내부주사(內府主事)로 임관되어 고종황제의 어전통역(御前通譯)으로 활동하고 1887년 영국·독일·러시아 등 외국순방에 참여하였으며 1889년 궁내부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어 4년간 고종황제를 시봉하였다.
칠곡부사로 임명되었다가 1896년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한 독립협회 수석총무와 서법요원이 되어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우고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하여 대역부도 죄로 몰아 남궁억, 이상재, 방한덕 등 18명을 투옥하였다. 얼마 후 고종의 특별은사령(特別恩赦令)으로 석방되었으나 1898년 독립협회는 종말을 고하고, 동년 9월 5일 윤치호, 장지연, 이상재, 라수연 등과 손을 잡고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일간신문으로 발행하였다.
이 시비(詩碑)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한서(翰西) 남궁억(檍)의 무궁화시비이다.
남궁억은 시조 원청(元淸)의 30세손으로 중추도사 영(泳)과 배(配) 덕수이씨와의 12남매 중 외아들로 1863년(철종14)에 출생했다.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는 한서(翰西)이다. 20세때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22세에 고종황제의 통역관이 되어 다재다능(多才多能)한 능력이 인정되어 23세에 내부주사의 관직을 받아 칠곡부사·성주목사·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내부토목국장때에는 정동 육조와 남대문사이 광화문길을 확장하고 파고다공원을 만드는 등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총무직을 맡아 독립신문 발간·독립문 건립·황성신문 창간 무궁화의 국화지정에 힘썼다. 1933년 무궁화당 사건으로 투옥, 1939년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일가들이 정성을 모아 무궁화노래를 새겨 독립기념관에 시비를 세웠다. 그 때가 1988년이며 자녀는 초대뉴욕총영사 염(炎)과 2녀를 두었다.
그의 업적을 보면 첫째, 황성신문사장·광동학회장 등 언론활동을 하였고 둘째, 무궁화를 국화로 제정하고 무궁화자수본 등으로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셋째, 양양현산학교와 홍천모곡학교를 창립하고 배화학당(현 배화여고)과 상동청년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넷째, 서예의 대가(大家)로 궁체를 보급하고 다섯째,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차례 투옥생활을 하였고 여섯째, 저서로는 동사략·조선이야기·가정교육 등 10여편과 무궁화노래·기러기노래·일하러가세 등 많은 노래를 지어 보급하였다.
公은 세보상(世譜上) 32世이며 대사성공(大司成公) 무편(戊編)에 속(屬)한다. 號는 초몽(草夢)이고 인천 강화(江華)에서 아버지 훈(薰)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一男一女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였다. 1894年에서 1921年 까지 시인(詩人)으로서 짧은 삶을 살았다.
1912年 서울 한성고등보통학교(漢城高普)를 졸업(卒業)하고 오산중학교 교사(敎師)로 잠시 재직(在職)하였다.
그 뒤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협회(東京音樂協會) 간사(幹事)로도 있었으며,1920年에 창간(創刊)된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변 영로(卞 榮魯), 오 상순(吳 相淳), 염 상섭(廉 想涉) 等과 교분(交分)하던 구한말(舊韓末) 5大 시인(詩人)으로 꼽히는 천재(天材)이기도 하나 너무 짧은 생애(生涯)가 가슴아프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彊會月報) 1907年 1월號에 투고(投稿)하였던 애국설(愛國設)에서 당시(當時) 지도층(指導層)의 각성(覺醒)과 청소년교육(靑小年敎育)의 중요성(重要性)을 촉구(觸具)하기도 하였다.
작품 활동(作品 活動)은 主로 "청춘"과 "폐허" 및 "조선일보" 일본잡지인 "태양"을 중심(中心)으로 전개(展介) 되었는데, 일어(日語) 및 영어(英語)로 된 시(詩)와 수필(隨筆)도 있다. 1918年 "청춘"에 "孤獨은 너의 運命이다" 等 5篇의 일문시(日文詩)와 "나의 세상" "나의 사랑" 等 2篇의 영문시(英文詩)가, "폐허(閉墟)"에는 수상(隨想) "자연(自然)"(1920), "풀"(1921), "생명의 비의(生命의 秘義)"(1921) 등 4篇의 詩, 조선일보(朝鮮日報)에는 "신비의 인연(神秘의 因緣)", "출생(出生)" 等 7篇의 詩가, 1922年 "신생활"에는 "별의 아픔", "마(馬)" 等 5篇의 유고시 및 일기(日記)가 실려있다. 27歲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작품 수(作品 數)가 극히 한정(限定)되어 있으나, 얼마 남기지 못한 유작(遺作)들은 한국근대(韓國近代) 시사(詩史)에서 특이(特而)한 시세계(詩世界)를 보이고 있다. 卽, 유년기(幼年期)의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관념(觀念)과 초기시(初期詩)에서 보이는 미(美)와 우주적(宇宙的) 조화(調和)를 포함한 다양성(多樣性), 그리고 "폐허"지로 부터 본격화(本格化)한 시작(詩作)들이 지니는 사상(思想)이 시적(詩的) 특색(特色)이 되고 있다.
그의 문학(文學)은 당시(當時) 우리 문단(文壇)에 만연(蔓延)되고 있었던 병인적(病因的) 퇴폐성(退閉性)이나 감상(感想)에 물들지 않고, 그 나름대로 자연(自然)의 순실미(純實美)와 ‘생명의 비의’와 대지사상 等을 추구(追求)한 것 等을 특색(特色)으로 들 수 있다.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고려벽상공신(高麗壁上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역임(歷任)하신 諱 신(信)公의 9代孫이시고 간성공(杆城公)의 5대손(五代孫)이시다. 中宗 十一年(1526年)에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에서 아버지 諱 집(緝)公의 長男으로 비 교적(比較的) 부유(富裕)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1555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給第)하여 진사(進士)가 되tl고 그의 비범(非凡)한 재주와 문장(文章)이 성균관(成均館)에 까지 명성 (名聲)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그의 詩를 즐겨 외웠다.
公은 서울로 집을 옮기고 시골에는 첩(妾) 한 사람을 두어 매년(每年) 추수(秋收)를 하여 올려가곤 하였는데 妾은 절세미모(絶世美貌)에다 재주까지 비범(非凡)하여 그림과 글씨에 무불능통(無不能通)하니 公께서 지극(至極)히 총애(寵愛)하셨다. 그러나 妾이 이성(異姓)의 조 카와 간통(姦通)하는 것을 목격(目擊)하고 두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인 後 금대산(金臺山)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에 머물다가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의령야암(宜寧野菴)이라는 암자(庵子)에 머물게 되었다.그러던 어느날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도교(道敎)의 방술(方術)이 뛰어난 노승(老僧)이 무주(茂州) 치상산(稚裳山)의 어느 암자(庵子)에 기거(起居) 한다는 소식(所息)을 접(接)하시고 무주(茂州)에 있는 치상산(稚裳山)으로 찾아가서 그 노승(老僧)을 만나 신선술(神仙術) 수련(修練)에 입문(入門)하게 되었다. 수련과정(修練過程)은 정신통일(精神統一)을 위하여 잠 안자는 法과 곡기(穀氣)를 끊는 法을 익히고 이를 응용(應用)하여 내단수련(內丹修練)의 극치(極致)인 신태(神胎) 일보직전(一步直前)까지 도달(到達)하였다고 한다.
한 때는 오성(鰲城) 이 항복(李 恒福)이 젊었을 때 80이 넘은 公을 만나 감탄(感歎)하며 “선생(先生)께서는 90이 다 되셨는데도 정력(精力)이 젊은 사람 같으니 어떤 비방(秘方)을 쓰십니까”라고 질문(質問) 하였다고 류 광익(柳 光翼)의 저서(著書)인 사암집화(私岩輯話)에 소개(紹介)되기도 한다.이 수광(李 수光)은 그의 저서(著書)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소개(紹介)하기를 "언제나 명산 대천(名山 大川)을 떠 돌아다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가히 지선(地仙 : 땅위에 사는 神仙)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는 뛰어난 단학자(丹學者)로서 신선술(神仙術)의 대가(大家)이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위험(危險)에 처하여 피신(避身)한 젊은 충무공(忠武公) 이 순신(李 舜臣)을 만나 자식같이 돌보며 심신(心身)의 연마(硏摩)와 무예(武藝)를 가르쳐 후일(後日) 구국(求國)의 명장(名將)으로 왜적(倭敵)으로부터 조선(朝鮮)의 바다를 지켜 나라를 求하게 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조선 중기(朝鮮 中期)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때의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 두 선생전"은 "홍길동전"과 함께 쌍벽(雙壁)을 이루는 소설(小說)이다. 슬하(膝下)에 외아들 인(引)을 두었으나 불행(不幸)하게도 그 後에 기록(記錄)이 없어 아쉬움을 금(禁)치 못한다.
주: 참고문헌(參考文獻)으로는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과 신선단학(神仙丹學), 류 광익(柳 光翼)이 지은 사암집(私岩輯)과 류 몽인(柳 夢寅)이 지은 야담선도부(野談仙道部)가 있다.
남궁이 해냈어!
6.25 전쟁(戰爭) 中이던 1952年 10月 21日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임시(臨時) 수도(首都) 부산(釜山)에서는 감격적(感激的)인 사건(事件)이 벌어졌다.
1만 680톤 중량(重量)의 한국(韓國) 국적(國籍) 화물선(貨物船) 미스코리아號가 미국 서해안(美國 西海岸)의 포틀랜드港을 向하여 부산항(釜山港) 제 1 부두를 출항(出航)하는 일이다.
출항식(出航式)에 참석(參席)한 리 승만(李 承晩) 대통령(大統領)은 테이프를 끊기 전에 선내(船內)를 둘러보면서 박 옥규 선장(後에 海軍參模總長 歷任) 이하(以下) 항해사(航海士)와 기관사(機關士)들에게 흥분(興奮)된 어조(語調)로 “자네들, 이 배를 몰고 정말 미국(美國)에 갔다 올 수 있나?” 라고 물었다. “각하(閣下), 염려(念慮)하지 마십시오. 자신(自信) 있습니다.” 선장(船長)은 힘차게 대답했다. 李 大統領은 매우 흐뭇한 표정(表情)으로 일일이 선원(船員)들의 등을 두들겨 주며 격려(激勵)하였다.
李 大統領으로서는 일만톤급 한국(韓國) 국적(國籍)의 화물선(貨物船)이 가득히 고철(古鐵)을 싣고 대미(對美) 항로(航路)에 취항(就航)하는 것이 여간(如干) 대견스럽지 않았다. 대통령(大統領)은 큰 목소리로 “南宮이가 해냈어! 기어이 해냈어!” 라고 감격(感激)에 벅찬 말을 연발(連發)하였다. 大統領의 얼굴은 상기(上氣)되었고 더욱 흥분(興奮)되었다. 이 날의 주인공(主人公) 미스코리아 號의 선주(船主)는 극동해운㈜의 사장(社長), 38歲, 신장 180㎝의 당당한 체구(體驅)의 미남청년(美男靑年) 일본대 경제학부(經濟學部)를 졸업한 남궁 련(南宮 鍊)이었다. 당시(當時)에는 1만톤급 대형 화물선(大形 化物船)의 보유(保有) 국가(國家)가 다섯 나라도 안되었으며 일본(日本)도 갖지 못한 상태(狀態)였다.
1946年에 극동기업㈜을 출발(出發)로 사업(事業)을 시작(始作)하고 1949年에 극동해운㈜을 설립(設立)하여 3年 後에 이런 위대(偉大)한 일을 해내었으니 참으로 어른의 안목과 능력은 경이로운 바 있다. 그 후 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우리 나라 해운의 종가격인 대한해운공사의 사장(社長)으로 한국(韓國) 해운(海運)의 개척자(開拓者)의 자리에 당당히 임하게 되었다. 1958년 한국석유㈜를 설립(設立) 정부(政府)의 요청(要請)으로 울산에다 석유화학단지(石油化學團地) 건설(建設)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樹立)하고 대규모(大規模) 정유공장(精油工場)을 건설(建設)하기 위한 교섭차(交涉此) 도미(渡美)하였는데 4.19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좌절(挫折)의 큰 아픔을 안게 되었다.
5.16 이후에는 한국경제인협회(全經聯의 前身) 부회장(副會長)으로 군사 정부(軍事 政府)의 경제개발정책(經濟開發政策)에 적극(積極) 참여(參與)하고 한국종합제철㈜ 이사, 경제심의회 의원, 금융통화위원으로 활약(活躍)하면서 울산을 공업기지(工業基地)로 선정(選定)하는 많은 아이디어를 창출(創出)하여 제공(提供)하였다. 1968년에는 박대통령의 요청(要請)으로 노사 분규(勞使 紛糾)와 적자경영(赤子經營)으로 파산(破産) 직전(直前)인 대한조선공사를 인수(引受)하여 20년간 사장, 회장을 역임(歷任)하였으며 1973년에 온 재산(財産)을 투입(投入)하여 옥포에 조선소(造船所)를 건설(建設)하여 박대통령 임석하(臨席下)에 발주식(發注式)을 거행(擧行)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세계적 규모(世界的 規模)의 시각(視覺)을 가진 기업인(企業人)이었으며 한국(韓國)의 기적(奇蹟)은 곧 우리 해운(海運)과 조선(造船)에 의해 선도(先導)되었다 해도 결코 과언(過言)이 아니다. 바다와 함께 배와 함께 오로지 나라의 경제 재건(經濟 再建)을 위해 한 평생(平生)을 다 바치신 거인(巨人)이요, 자랑스러운 남궁(南宮)의 후손(後孫)이다.
그냥 좋아서
특기(特記)해야 할 일은 취미(趣味)로 즐겨 하셨던 컬렉션 이야기다. 고미술(古美術)에 관심(關心)을 가지시고 그냥 좋아서 모은 것이라는데 소장(所藏)한 것이 무려 3,000점이나 된다는 사실(事實)이다. 그 중에는 불상(佛象), 금관(金冠), 금채도기(金彩陶器) 등 진귀(眞貴)한 것들이 많고 국보(國寶)로 지정(指정)된 것, 국보급(國寶級), 보물급(寶物級)에 비견(比肩)할 만한 것이 상당수(相當數)이다. 또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 유물(遺物)이 800여점, 수백점의 탈 등 재미있는 물건(物件)과 대단한 物件들이 고루 있어 한국미술사(韓國美術史)를 바꾸어 놓을 만큼 귀중(貴重)한 것들이라는 중평(重評)이다.
代를 이은 종사(宗事)에 헌신(獻身)
27世 諱 복의 3男 1女 중 3男으로 1915年에 양주(陽州) 루원(樓院 : 現 방학동)에서 출생(出生)하였으며 호(號)는 강석(江石)이시고 항렬(行列)은 28世 윗 금(金)이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종사(宗事)를 도우셨다.
公께서는 선조(宣祖) 38年(1605年)에 아버지 諱 부와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4男 1女 中 4男으로 출생(出生)하시었고, 중부(仲父)이시며 통정대부 음사(通政大夫 蔭仕),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돈녕부 직장(敦寧府 直長), 무주현감(茂州縣監)을 지내신 諱 격(格)公에게 입양(入養)되어 교리공(校理公) 병편(丙編) 21世로 代를 이으셨다.
字는 회이(晦而)이시고 관직(官職)은 통사랑(通仕郞)에 올랐으며 덕행(德行)과 학문(學文)이 뛰어나 칭송(稱頌)을 받았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因)하여 인조(仁祖) 임금이 삼전도(三田度 : 지금의 송파)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무릎 꿇고 항복(降伏)하는 것을 보고 비분애통(비분애통)하시고 한비(汗碑 :오랑캐의 碑石)가 세워지니 그 땅을 더럽게 여겨 105결(結: 30萬坪)의 토지(土地)의 재산권(財産權=文書)을 불사르고 다시는 자기 소유(所有)로 삼지 않았으며 생각하지도 않고 의연(毅然)히 강원도 홍천 모곡으로 은거(隱居)하여 한 生을 마감하시니 세인(世人)들은 그를 칭송(稱頌)하여 노중련(魯仲連 :魯나라의 學者)과 같은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배위(配位)는 현풍 곽씨(玄豊 郭氏)와 장수 황씨(長水 黃氏)사이에서 3男 5女를 두시니 長男은 장연부사(長淵府사) 諱 후, 次男은 諱 무, 3男은 諱 서 이며 5女는 이 지학(李 志學), 신 준(申 準), 강 여위(康 汝衛), 윤 익준(尹 益雋), 윤 흥일(尹 興一)이다. 효종(孝宗) 7년(1656年)에 향년(享年) 52歲로 타계(他界)하셨다. 墓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동막골 선영하(先塋下) 亥坐에 모시었다.
근세 분야별 인물 .
公은 세보상(世譜上) 30世이시며 1863年 서울 왜송골에서 아버지 중추도사(中樞都事) 諱 영(泳)과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 李氏)의 12남매(男妹)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였다. 字는 치만(致萬), 號는 한서(翰西)이시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나 학업(學業)에 대한 열정(熱情)과 큰 꿈은 버릴 수 없었다.
1. 관력(官曆)
1884年(高宗21年)에 영어(英語) 학교(學校)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修了)하고 총해관(總海關)의 견습생(見習生)으로 있다가 1886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다. 1887年 전권대신(全權大臣) 조 민희(趙 民熙)의 수행서기관(隨行書記官)으로 영국,러시아,독일의 순방(巡訪)하고 돌아와 궁내부별군직(宮內府別軍職)을 거쳐 1893年에는 칠곡 군수(漆谷 郡守)를 지내셨다. 1894年 갑오경장(甲午更張) 내각(內閣)에 내부토목국장으로 중용(重用)되어 서울 종로(鐘路)와 정동(貞洞)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道路)를 정비(整備)하는 동시(同時)에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2. 독립(獨立),애국(愛國) 계몽운동(啓蒙運動)
1896年 2月 아관파천(俄館播遷) 後에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그해 7月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創立)하여 중앙위원,서기 사법위원,평의원 등에 선출(選出)되고 고위지도자(高位指導者)로 활동(活動)하였으며,독립협회(獨立協會)의 기관지(機關紙)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의 발행(發行)에도 참가(參加)하였다.
1898년 9月 나수연(羅壽淵), 유 긍等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創刊)하고 사장(社長)에 취임(就任)하여 국민(國民)을 계몽(啓蒙)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활동(活動)을 적극(積極) 지원(支援)하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체제(政治體制)를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로부터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개혁(改革)하여 의회(議會)를 설립(設立)하고 대대적(大大的) 개혁(改革)을 단행(斷行)하려는 독립협회운동의 지도자(指導者)로 활동(活動)하다가, 1898年1月에 17명의 지도자(指導者)와 함께 붙잡혔다.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해산(解散) 當한 뒤 1900年 7월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러시아와 일본(日本)의 한국분할설(韓國分割說)을 외국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침략야욕을 폭로(暴露)하고 경각심(警覺心)을 촉구(促求)하는 논평(論評)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拘禁)되었다.
또한,1902년 5월 《황성신문》에 일본이 갑오년(1894年) 동학운동 이래(以來)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러일협정의 침략적 성격(性格)을 논박(論駁)한 사설(社說)을 실었다가,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구속(拘束)되어 심한 고문(拷問)을 받고 4개월 만에 석방(釋放)되었다. 1903年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社長) 남궁 억(南宮 檍)과 총무(總務) 나 수연이 일본(日本)에 망명(亡命)해 있는 박 영효(朴 泳孝) 등과 공모(共謨)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謀陷)하여 다시 경무청(警務廳)에 구속(拘束)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4개월(四個月) 뒤에 석방(釋放)되었다. 출옥(出獄)한 뒤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직(社長職)을 사임(辭任)하였다.
1905년 3월 고종(高宗)의 간곡(懇曲)한 요구(要求)로 다시 관직(官職)을 맡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赴任)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일본이 1905년 11월 무력(武力)으로 위협(威脅)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强制)로 체결(締結)하고 국권(國權)을 박탈(剝奪)하자 통분(痛憤)하여 職을 사임(辭任)하고 또다시 귀경(歸京)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06年 2月에 다시 양양군수(襄陽郡守)에 임명(任命)되자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에 참가(參加) 하여 1907年 7月에 양양(襄陽)의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設立)하고 구국교육(求國敎育)을 실시(實施)하였다. 1907年 일본이 헤이그 특사사건(特使事件)을 구실로 고종(高宗)을 강제(强制)로 양위(讓位)시키고 정미 칠조약(丁未 七條約)을 체결(締結)하여 침략전쟁(侵略戰爭)을 강화(强化)하자 또 다시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상경(上京)하였다.
1907年 11月 권 동진, 여 병현, 유 근, 이 우영, 오 세창, 윤 효정, 장 지연, 정 운복, 홍 필주,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創立)하고 회장(會長)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展開)하였으며 그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4월 강원도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를 창립(創立)하여 회장(會長)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發行)하였다. 1910년8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합(倂合)하자 새 세대교육의 현장(現場)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해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敎師)가 되었고, 1912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원장(院長)을 겸하면서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鼓吹)시키고,
3.낙 향(落鄕)
1918年 건강(健康)이 악화(惡化)되어 친지(親知)들의 권고(勸告)에 따라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에 낙향(落鄕)하여 1919年 9月에 모곡학교를 설립(設立)하였다. 모곡학교에 무궁화묘포(無窮花苗圃)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의 보급운동(補給運動)을 전국에 걸쳐 전개(展開) 하였다.또한 애국적(愛國的) 찬송가(讚頌歌)를 만들어 전국(全國)의 교회(敎會)와 기독교계(基督敎係) 학교(學校)에 보급(補給)하였다.
1933年 11月 기독교계열(基督敎系列)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비밀결사조직(秘密決死組織)인 십자가당(十字架當)을 조직(조직)하여 활동(활동)하다가 일본경찰(日本警察)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投獄) 되었다. 노령(老齡)이 참작(參酌)되어 석방(釋放)되었으나 일본경찰로부터 받은 잔혹(殘酷)한 고문(拷問)의 여독(餘毒)으로 별세(別世)하였다.1977年에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에 추서(追敍)되었다.저서(著書)로는《동사략 東史略》《조선이야기》《조선의노래》《기러기 》《무궁화 동산》등이 있다.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며 교리공 병편(校理公 丙編)에 속한다. 아버지 단(檀)씨와 어머니 풍천 임씨(豊川 任氏)의 2男 中 長男으로 1882年 5月16日에 서울에서 출생(出生)하셨다. 1900年에 배재학당(現 培材高)을 졸업하시고, 그 後 평양신학교에 재학(在學)하면서 비어드와 신학교 교재(敎材) 번역(飜譯)에 헌신(獻身)하고 1921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留學)하여 프린스턴 신학부에서 M.A학위를 받고 1925년에는 리치먼드 유니온 신학교 연구과(硏究科)를 수료(修了)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26歲의 젊은 나이로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신학박사(神學博士) 학위(學位)를 받았다. 귀국(歸國)하여 모교(母校)인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수(神學敎授)가 되고 목사(牧師) 안수(按手)도 받았으며 24년간 봉직(封職)하다가 일제(日制)의 신사참배(神社參拜) 반대(反對) 문제(問題)로 학교가 폐교(閉校)되니 1939년 상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참여(參與)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성경(聖經) 주석(註釋)에 전념(專念)하였으며 1946년 해방(解放)과 더불어 귀국(歸國)하여 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선교활동(宣敎活動)을 하고 기독교 방송국 설립(設立)을 위하여 노력(努力)하던 중 6.25 전쟁(戰爭)이 발발하여 동년(同年) 8月 3日에 공산군에게 납북(拉北)되어 그 곳에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生을 마치시니 영영 고향(故鄕)땅을 밟지 못하셨다.부인(婦人)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로 남편(男便)과 같이 사회운동(社會運動)과 선교활동(宣敎活動)에 기여(寄與) 한 바 크다.
슬하(膝下)에는 7男과 2女를 두었는데 곧 長男 요한(堯漢), 次男 요섭(堯攝),3男 요세(堯世),4男 요설(堯卨), 5男 요직(堯稷),6男 요백(堯伯),7男 요숙(堯叔)과 2女는 차광조와 정현웅(요안나氏의 夫君)씨이다.2男 요섭의 세째 아들 건(鍵)씨는 북한(北韓) 외교통(外交通)으로 남북대화(南北對話)에 큰 활약(活躍)을 하였다.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시며 대사성 무편(大司成 戊編)에 屬한다. 아버지 諱 계(棨)씨와 부인 해주 최씨(海州 崔氏)의 4男 中 長男으로 1865年 5月 17日 강화(江華)에서 출생(出生)하셨으며 字는 경순(耿淳)이고 號는 일우(一愚)이시다. 장성(長成)하면서 학업(學業)에 정진(精進)하시고 젊어서부터 사회운동(社會運動)의 선봉(先鋒)으로 활동(活動)하시고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의 3代 사장으로 크게 공헌(供獻)하고 회양군수(淮陽郡守)에 재임(在任)하는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郡民)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강화 진위대(鎭衛隊)의 참령을 거친뒤 기호학회(畿湖學會) 총무(總務)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이동휘(李東煇)씨와 특히 친밀(親密)하게 지냈으며 조선일보 3대 사장에 취임(就任)하여 그의 강직(强直)한 성품(性品)과 청족(淸族)의 자손(子孫)으로서 기개(氣槪)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1924年에는 조선일보사 판권(版權)이 신 석우(申 錫雨)씨에게 넘어가자 월남(月南) 이 상재(李 商在)선생에게 사장직(社長職)을 넘겨주고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회장(會長)을 맡기도 하면서 서울 필운동에 은거(隱居)하다가 해방직전(解放直前)에 강화로 낙향(落鄕)하여 1946年에 향년(享年) 81歲로 타계(他界)하셨다. 부인(婦人) 전주 이씨(全州 李氏) 사이에 1男 벽(壁 : 시인)씨를 두셨으나 일찍 요절(夭折)하므로 조카 기(基)씨를 입양(入養)하여 代를 잇고 있다.
아래에 公과 조선일보(朝鮮日報)와의 얽힌 이야기를 소개(紹介)하기로 한다.
조선일보는 창간(創刊) 직후 극심(極甚)한 재정난(財政難)과 총독부(總督府)의 기사 탄압(記事 彈壓)에 시달렸다. 재정(財政)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주(社主)도 없었고 후원(後援)을 기대(期待)한 대정실업친목회와도 5개월 만에 결별(訣別)해 재정상태(財政狀態)는 말이 아니었다. 재정난으로 표류(漂流)하던 조선일보는 1921년 4월8일 송 병준(宋 秉晙)의 손에 넘어갔다.그는 “6000원의 헐가로 조선일보를 매수”(개벽 1924년10월)했다. 송 병준(宋 秉晙)은 이 완용(李 完用)과 더불어 매국(賣國)의 원흉(조선일보 1926년2월13일)으로 불리던 인물(人物)이다. 그는 처음엔 많은 이익을 붙여 조선일보를 다른 사람에게 다시 넘기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원로(元老) 언론인(言論人) 남궁 훈을 사장으로 영입(迎入)하기에 이른다. 남궁 훈은 당시 66세로 기개(氣槪)가 꼿꼿한 지사(志士)였다.그는 구한말 황성신문 사장을 지냈다. 1904년 이 신문이 경영난에 처하자 집문서를 저당(抵當) 잡혀 속간(續刊)시켰고, 1905년 장 지연의 유명한 논설(論說)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린 신문(新聞)을 배부(配付)하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 그는 이때를 회고(回顧)하며 “이날 신문을 배부하던 광경이 일생에 잊지 못할 일이며 민간신문을 성공(成功)시키지 못한 것이 일생(一生)에 유감(遺憾)” (조선일보 1932년1월6일) 이라고 했다.
남궁 훈은 송 병준의 거듭된 요청(要請)으로 사장직(社長職)을 맡으면서 두 가지 조건(條件)을 내세웠다.첫째, 신문 제작(新聞 製作)에 한 자라도 용훼(용훼)하지 말 것.둘째, 사원 채용(社員 採用)에 간섭(干涉)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는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잃지 말라고 하는 말과 같이 누구 돈이든지 일만 정당(正當)하게 하면 된다”고 사장직을 수락(受諾)한 이유(理由)를 설명(說明)했다.(조선일보 1933년4월27일) 그는 조선일보가 "민중의 벗”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판권(版權)은 송 병준이 가졌지만 지면 제작(紙面 製作)과 인사(人事)에서 남궁 훈은 송 병준의 간섭(干涉)을 차단(遮斷)했다. 남궁 훈은 기존(旣存)의 이름뿐이었던 사장들과 달리 사장의 실질적(實質的)인 업무(業務)를 철저(徹底)하게 챙겼다. 그는 수표동 사옥 2층 온돌방 사장실에 보료를 깐 채 신문 대장(인쇄하기 전의 지면)을 직접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겼다. “대소사무를 총괄(總括)하여 처리함은 물론이거니와 영영세세한 기사(記事)에까지 첨삭(添削)을 행하야 무불간섭의 태도”(개벽 1923년7월)를 취한 것이었다. 그는 ‘보도 제일주의’를 주창(主唱)해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관련 기사도 과감(果敢)하게 앞장서서 보도(報道)했다. “그 때 상해(上海)에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어 그 소식, 그 자료(資料)를 어떻게 할까?(논란이 있었습니다)나는 서슴지 않고 ‘보도’라고 했습니다. 보도! 한 신문으로서 기자(記者)의 직책(職責)으로서 다만 ‘보도’를 했다. 그 후에야 동아일보에서 서로 앞다투어 상해(上海) 임시정부 소식(消息)을 게재(揭載)하였다.”
다시 1920년대 초반 불이 붙기 시작한 조선인의 소작쟁의(小作爭議)에 대한 보도(報道)도 지시(指示)했다. 그는 “당국(當局)에서는 선동(煽動)을 한다는 등 여러 가지의 말이 있었다.”면서 “이역(또한) 중대한 사변이니까 다만 사실로서, 엄연한 사실로서 보도에 힘을 썼던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문 언론인(言論人)답게 활자(活字)를 바꾸고 지면(紙面)의 쇄신(刷新)을 加해 취임(就任) 당시 3000부이던 발행부수(發行部數)를 1만 5000부까지 끌어 올렸다. 1938年 조선일보 지령(紙齡) 6000호 기념호(記念號)는 이전 사장인 조 진태와 유 문환을 무시(無視)한 채 남궁 훈을 “조선일보 초대 사장”이라 적기도 했다.남궁 훈은 조선일보 사장으로 재직(在職)하는 동안 외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아버지 諱 의씨와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2男 中 長男으로 1901년4월18일 출생(出生)하여 보성전문학교(寶城專門學敎)를 졸업(卒業)하였다. 1919년 3월13일 전라 북도 전주(全州)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萬世示威)때 남문(南門) 밖 장터에서 고형진,박태련 등과 함께 학생(學生), 시민(市民) 등 군중(群衆)들에게 태극기(太極旗)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配布)하고 시위(示威)를 주도(主導)하다가 일경(日警)붙잡혔다.같은해 8월 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光州地方法院 全州支廳)에서 징역(懲役) 1년을 언도(言渡) 받았으며 같은 해 9월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懲役) 6월을 선고(宣告) 받았는데 재판과정(裁判過程)에서 굽히지 않고 줄곧 법정투쟁(法庭鬪爭)을 전개(展開)하었다. 1927년 3월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영광 청년회에 가입(加入)하여 활동(活動)하였고, 같은 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민족해방투쟁(民族解放鬪爭)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31년 12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다.
1932년 7월부터 1933년 1월 사이에는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자택(自宅)에서 정판갑과 함께 조기 건조사업(乾燥事業)을 하여 그 수익금(收益金)으로 희생(犧牲)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가족(家族)들의 생계(生計)를 지원(支援)하는 조직(組織)을 설립(設立)하려다 사전(事前)에 발각(發覺)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1934년 7월 전주 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또다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2년이 확정(確定)되었다. 그 뒤 1939년 10월에도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또 다시 금고(禁錮) 8월을 언도 받았으며 1941년 3월19일 옥고(獄苦)의 여독(餘毒)으로 사망(死亡)하였다.
1986년 12월26일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追敍) 되었으며 (번호 486호), 대전국립묘지(大田國立墓地) 독립유공자묘역(獨立有功者墓域)에 이장(移葬)하여 안치(安置) 되었다. 유족(遺族)으로 아들 성(城)과 손자 신(臣)이 있으나, 아들은 출생 (39년1월27일) 1년여 만에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公은 함열 남궁씨 세보상(世譜上) 32世로 지평공파 갑편(砥平公派 甲編)에 속한다. 아버지 혁(爀)公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1男1女 中 長男으로 1920年 8月1日에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976번지에서 출생(出生)하셨다.1933年 춘천 보통학교(現 春川 初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춘천고등 보통학교(現 春川 高等學校)에 진학(進學)했다.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거성(巨星) 한서(翰西) 남궁 억 선생에게 감화(感化)를 받아 배일 사상(排日 思想)이 투철(透徹)했던 그는 춘천고보 5학년이던 1937년9월 동급생(同級生) 이 찬우, 문 세현, 용 환각, 백 흥기, 조 규석, 성 수경과 함께 조선(朝鮮)의 독립(獨立)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상록회”를 조직(組織)하고 부회장(副會長)에 취임(就任)하였다.(회장은 조 규석) 이때 “상록회”의 강령(綱領)도 채택(採擇)하였는 바, 1. 회원으로서 자기완성 2.지도자로서 책임완수 3.단결력 배양으로 항일투쟁을 한다는 것이며, 회가(會歌)도 직접 작사(作詞)했다.동시(同時)에 “상록회“의 활성화(活性化)와 동지 확보(同志 確保)를 위한 구체적(具體的)인 사업(事業)으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組織)하여, 매월(每月) 월례회(월례회)때 독후감(독후감) 발표(발표)와 함께 현실 문제와 민족의 독립문제(독립문제)를 토론(토론) 하였다.또한 나라의 독립이 농촌의 자립(自立)을 통해 가능(可能)하다고 판단(判斷)하고, 적극적인 농촌계몽사업(農村啓蒙事業)도 전개(展開)하였다.
1938년 3월25일 춘천고를 졸업한 뒤 이 찬우,문 세현,백 흥기 등과 함께 만주(滿州) 길림(吉林)의 김 춘광 동지(同志)의 집으로 피신(避身)하였으며 그곳에서 《만주 상록회》를 조직(組織)하였고 자신은 하얼빈 지역책으로 만선일보 하얼빈 지사장(支社長)이 되어 ‘한인교회”를 통한 특수공작임무(特殊工作任務)를 부여(賦與) 받았다. 이리하여 1938년 9월에는 춘고의 “상록회”활동(活動)이 교외 청년들과도 연결(連結)되었으며 만주(滿州)로 간 졸업생들이 독립운동 지도자(指導者)들과 연결됨으로써 더욱 활발(活發)하게 전개(展開)되었다. 이렇듯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지하활동(地下活動)을 전개하던 “상록회’ 의 장거는 1938년 말 일경에 탐지(探知)되어 관련자(關聯者) 137명이 검거(檢擧)되고 36명이 송치(送致)되는 비운(悲運)을 맞이했다. 1939년 12월27일에는 당시 경성지방법원 형사2부에 입건(入件)된 36명중 주모자(主謨者) 12명이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1조 위반(違反)으로 2년 6월의 징역형(懲役刑)이 언도 되었다. 公께서는 왼쪽팔이 불구(不具)가 되는 어려움 속에 1941년 출옥(出獄) 후 다시 만주로 피신(避身)하여 “만선일보” 기자(記者)로 활동(活動)하다가, 1944年에 남궁 명호란 이름으로 춘천에 귀향(歸鄕)하였으나 1945년 7월 20일 재차(再次) 일경의 검거령(檢擧令)이 내려져 고향(故鄕)인 모곡의 산중(山中)으로 피신(避身)하였다. 1945년 8.15광복(光復)을 맞아 춘천으로 돌아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서 잠시 활약(活躍)하다가 같은해 10월 24일에는 강원일보의 전신(前身)인 ‘ 《팽오통신》을 창간(創刊)하였으며 11월 27일 제27호부터 《강원일보》로 제호(題號)를 바꾸었다. 이 때 발행인(發行人) 겸 편집인(編輯人), 편집국장(編輯局長)을 겸임(兼任)하였다.
1948년에는 서울의 평화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집필활동(輯筆活動)을 하다가 1950년 6.25사변(事變)으로 다시 고향 모곡의 산중으로 피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부락민(部落民)의 밀고(密告)로 후퇴(後退)하는 인민군(人民軍)에게 피납되어 북으로 끌려 가던 중 춘천시 우두동에서 인민군에 의해 총살(銃殺) 당했다 한다. 이 때 태씨의 나이 만 30세에 불과(不過)했다.(목격자 백 태호 사망. 생존했을시 110세)유족(遺族)으로는 입양동생인 종(琮)씨가 춘천 후평동에 살고 있으며 부친(父親) 혁(爀)씨와 모친(母親)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아들의 소식(消息)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1960年과 1974年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註 : 춘천고등보통학교(春川高等普通學校)의 상록회운동(常綠會運動)은 춘천지방 학생비밀결사운동(學生秘密決死運動)의 선구적(先驅的)인 것으로 이 지역 학생운동에 큰 영향(影響)을 미쳤다. 1967년 4월26일 제 43회 개교기념일(開校記念日)을 맞이하여 상록회활동(常綠會活動)을 기리기 위한 《상록탑》의 제막식(除幕式)을 가졌다.
公은 세보상(世譜上)으로 31世이시며 지평공파 병편(砥平公派 丙編)에 속하신다. 아버지 회(檜)씨의 3男으로 1900년 1월 27일 출생(出生)하여 어린 소년시절 쓰러져 가는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애국심(愛國心)에 불타 기미년(己未年) 3.1운동에 참여(參與)한 후 항일독립운동가(抗日獨立運動家)로 활동(活動)하다가 해방(解放)을 맞고 1971년 별세(別世)하셨다. 公은 충북도지사(忠北道知事)를 지내신 영(營)씨의 막내동생이시다.
부인(婦人) 나주 채씨(羅州 蔡氏)와의 사이에 1女 만을 두시니 해주인(海州人) 오 현태(吳 鉉泰)이다.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시며 대사성 병편(大司成 丙編)에 속하신다.1912년 9월16일 아버지 표(杓)씨와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 趙氏) 사이의 5男 3女 中 차남(次男)으로 출생(出生)하였으나 장형(長兄 : 맏형) 현(炫)씨가 큰아버지에게 입양(入養)되므로 사실상(事實上) 장남(長男)이 되었다.
일본(日本)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을 졸업(卒業)하고 일찍부터 일제(日制)의 만행(蠻行)에 저항(抵抗)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에 투신(投身)하였으며 1942年에는 동아연맹(東亞連盟) 항일운동(抗日運動)으로 투옥(投獄)되어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조국(祖國)의 해방(解放)과 함께 출옥(出獄)하여 정부수립(政府樹立) 후에는 서울시 관재국장을 역임(歷任)하였다. 부인(婦人) 밀양 손씨(密陽 孫氏)와의 사이에 2男과 1女를 두시니 長男은 역곡(驛谷 : 부천시) 南宮病院長 승(勝)씨이고 次男은 준(遵)씨 1女는 수안인(遂安人) 이 두남(李 斗男)씨이다.
公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석목리에서 1885년 12월 23일 아버지 낙(洛)씨와 어머니 결성 장씨(結城 張氏)의 3男 1女 중 長男으로 출생(出生)하였다. 字는 훈오(薰五)이시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할 뿐 아니라 리장(里長)으로 20년을 재직(在職)하면서 동민들을 가족(家族)같이 친절(親切)히 보살피고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지도(指導)하며 한편으로는 독립정신(獨立精神)을 고취(鼓吹)시키어 일제(日制)가 침략자(侵略者)임을 주지(周知)시키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길을 선도(先導)하였다. 이에 감동(感動)하여 부여군수(扶餘郡守)로 추대(推戴)하였으나 극구(極口) 사양(辭讓)하여 끝내 응하지 않으셨다.
슬하(膝下)에는 부인(婦人) 김해 김씨(金海 金氏)와의 사이에 2男과 5女를 두시니 長男은 촉(燭)씨, 次男은 동양 의학박사이며 철학가인 상(祥)씨와 5女는 장발인(長髮人) 정 용구(鄭 容九), 임천인(醴泉人) 임 규상(林 奎相), 전의인(全義人) 이 동린(李 東麟), 연일인(延日人) 정 기철(鄭 基喆), 함양인(咸陽人) 박 의식(朴 義植)이다.
세보상(世譜上)으로는 대사성 병편(大司成 丙編)에 속하며 세수는 30세이시다.
1911년 2월10일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서 아버지 찬(?)님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1男 2女 中 長女로 출생(出生)하여 모곡 보통학교를 거쳐 원산(元山)의 루시여고를 졸업(卒業)하고 1932년 모교(母校)의 교사(敎師)로 부임(赴任)하여 한서(翰西) 남궁 억(南宮 檍) 선생을 도와 일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는 무궁화 사건(事件)에 연루(연루)되어 28명이 투옥(投獄)되고 그 중 12명이 옥고(獄苦)를 함께 치루었다. 이분은 결혼(結婚)한지 얼마되지 않은 1943년에는 포천군 가산면 가산리로 이사(移徙)하여 보통학교 교사(普通學校 敎師)로, 또한 포천군청(抱川郡廳)에 재직(在職)하면서 대한부녀회(大韓婦女會) 포천군 지부장(抱川郡 支部長)을 맡아 여성운동(女性運動)과 사회계몽운동(社會啓蒙運動)을 지도(指導)하였다.
1949년에 가산교회(아버지 남궁 찬 장로가 개척)의 담임 전도사(擔任傳道師)로 부임(赴任)하여 (아버지 소천 직후) 전도(傳導)에 힘쓰며 미군(美軍)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신축(新築)하여 봉헌하고 이어 내촌교회, 포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향년(享年) 54歲로 너무 빨리 1964년 1월30일 소천(所天)하여 가산면 가산리 614-8에 안장(安葬)하였다.
부군(夫君) 이 원종(李 원종)씨의 슬하(膝下)에는 규철,규열 형제(兄弟)를 두었다. 오빠는 철학박사(哲學博士)인 탁과 여동생 정희(정희)씨는 삼선교회(삼선교회)의 장로이다. 세보상으로 31세 (砥平公.丁編)이다.
욱(旭)씨는 1885년 12월25일 평산군 적암면에서 아버지 약(?)과 어머니 풍천임씨(豊川任氏)의 3男 2女 中 長男으로 출생(出生)하여 청년시절(靑年時節)에 천도교(天道敎)에 입문(入門)하여 33人의 한 사람인 최 린 선생과 함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참여(參與)하였다. 주로 중국(滿州)과 미국(美國)을 드나들며 활동(活動)하였으며 미국에서 임병직(前 外務長官)과 가까이 지냈다. 국내(國內)에서는 신분(身分)을 숨긱기 위하여 수시(隨詩)로 이사(移徙)하였다.그로 因하여 가족(家族)들의 생활(生活)은 아주 곤란(困難) 하였다. 신분을 위장(僞裝)하기 위하여 수증기(水蒸氣)로 치료(治療)하는 물리치료기(일제때는 아주 선진적이었다.)와 한약(漢藥)과 홍화가루를 가지고 많은 病을 고쳐 주기도 하였다.그러다가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강릉형무소에서 보냈다.일련의 행적으로 보아 만주에 있던 독립군과 미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후에는 청우당(靑友黨) 평산군 책으로 건국운동(建國運動)을 하시다 북한 정권에 의해 반동(反動)으로 몰려 투옥(投獄)되기도 하였다.
세보상(世譜上)으로 31 世(延安公派 丙編)에 屬하며 부인(婦人) 달성인(達城人) 서수정씨와 순흥인 안경자씨에서 4男 卽, 長男 두, 次男 홍룡,三男 복, 四男 정과 2女 김덕원과 녹자를 두었으나 아직도 이산(離散)의 아픔을 안고 남북(南北)으로 흩어져 살고있다.
한편 작은 욱(昱)이라는 욱씨는 큰 욱(旭)씨와 함께 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에서 같이 살면서 함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하였고, 해방후(解放後)에는 청우당 활동(靑友黨 活動)도 함께 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더 이상 자세한 행적(行跡)을 알 수가 없어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1883年 6月7日 강화(江華)에서 출생(出生). 字는 경호(耿浩) 號는 녹은(祿隱)이며 아버지 계(棨)님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4男으로 세보상(世譜上)으로는 31世(大司成公,戊編)에 속한다. 아주 가난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났으나 영특(英特)하시어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여 한학(漢學)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효심(孝心) 또한 깊어서 선조(先祖)와 부모공경(父母恭敬)에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다하셨다. 일제(日制) 때 8대조(八代祖) 諱 헌(헌)의 묘소(墓所)가 있는 선산(先山)을 공동묘지(共同墓地)로 만들려고 할 때 온갖 방법(方法)을 써서 저지(沮止)하다가 일경(日警)에 연행(連行)되기도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자 결국(結局) 다른 곳으로 옮겨서 정하게 하였다.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유린되니 청년회를 조직하여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하는등 사회운동을 하며 동시에 항일 운동에도 앞장섰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15 해방후에는 농지개혁으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 위로 밭 4000평과 논 9000평이 농지 분배에 들어가 제향을 모시기 어렵게 되자 중앙 각계 요로에 앞장서서 진정한 나머지 분배에서 제외시키어 향사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이 공을 높이어 충렬사 경내에 유림에서 공적비를 세웠다. 강화 향교의 전교, 충렬사 도유사를 맡아 유림의 지도자로 헌신 하였다.
배우자는 전주 이씨로 슬하에는 3남2녀를 두시었다. 장남은 종친회 이사와 고문을 지낸 채씨,차남 용과 삼남 기 2녀는 이치평과 구성회이다. 특히 공의장형인 황성신문,조선일보의 사장을 지낸 훈(薰)씨이며 조카 시인 벽(壁)이 요절하므로 삼남 기(基)를 양자하여 대를 잇게 하였다.
남궁염은 1889년경 서울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남궁억의 외아들로, 일찍이 배재학당에서 영어공부를 한 뒤 1905년 일본에 체재하던 박영효의 도움으로 미국 여행권을 취득했다. 1907년 11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갔지만 정착에 어려움을 겪어 버지니아로 이동해 그곳에서 고학하여 랜돌프 매건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교수의 추천으로 한 은행에 취직했다가 마침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구성하고 있던 이승만과 만났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남궁억의 외아들을 머나먼 타지에서 조우한 것에 매우 반가워했고, 이때부터 남궁염은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구미위원부 활동을 도왔다. 그는 낮에는 은행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구미위원부에나가 재무 일을 맡았으며, 미국에 체류하는 한인들에게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남궁염은 1924년 8월 20일 이승만의 소개로 우복자와 결혼했으며, 1926년 이승만을 후원하는 동지회가 뉴욕에서 창립될 때 참여했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주선소를 운영하기도 했고, 향수 도매를 하기도 했다. 또한 1928년 뉴욕 최초의 한글신문인 <3.1 신보>가 뉴욕에서 발행될 때, 그는 자녀들과 함께 발송 역할을 수행했다.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 지부 대표 후보를 역임했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경제위원을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8.15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뉴욕에 처음 뉴욕총영사관이 세워졌다. 뉴욕총영사관은 1949년 4월 1일을 기해 업무를 시작했고, 초대 총영사는 이승만의 특명에 따라 남궁염이 임명되었다. 남궁염은 마침 뉴욕에 와있던 이순용 전 내무장관과 함께 임시 사무실을 하나 얻어 공관 준비를 하다가 본국 정부와 상의한 끝에 맨해튼에 건물 하나를 물색했다.
9E, 80가로 부근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구겐하임 박물관 등이 있는 이 4층 건물은 공관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지하실은 식당, 1, 2층은 사무실, 3, 4층은 사저로 개수를 마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하지만 해외공관 경비를 최소한 줄여 쓰라는 외무부의 훈령에 따라 가구를 변변히 구입하지 못해 아파트에서 사용하던 가구를 임시로 사용했고, 청소비를 절약하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려 남이 안볼 때 가족들이 총동원되어 청소를 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남궁염은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을 찾아가 위로했고, 한미재단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 구호물자 수송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미국 각지에 초청을 받아 한국의 어려운 실태를 설명하며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여러번 수행했다. 그는 총영사관 업무가 늘어나자 부영사로 최용진을 두고 고용원도 늘렸지만, 정작 자가용 승용차를 두지 않았다.
1955년 7월 8일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理事官)에 임명되었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그해 6월 그도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롱아일랜드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하와이로 망명간 이승만을 방문하려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그러지 못하고 1961년 11월 29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롱아일랜드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74년에 화장된 뒤 국내로 이송되어 강원도 홍천 선영에 묻혔다.
남궁염의 장남 남궁준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미우주항공국 리서치 엔지니어로 근무했고, 둘째 딸 혜원은 아시아개발은행에 근무하던 민병휘와 결혼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터내셔널 스쿨의 카운슬러로 근무했다. 그리고 막내아들 남궁진은 미 농무성 산림국 육종고문으로 재직했고,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임목육종학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남궁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897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서 태어났다. 화도면 월산리의 3·1운동은 화도면에 거주하던 이달용(李達鎔) 등의 주도 아래 비밀리에 추진되다가 1919년 3월 16일에 사전 발각되었고, 이때 이택하(李澤夏), 이재하(李載夏), 이승보(李承輔) 등 다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07년 설립된 월산교회와 배인학당에서 선교와 교육 양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김필규(金弼圭)는 전열을 정비하여 1919년 3월 18일로 거사일을 다시 정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조직하였다.
1919년 3월 18일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 일대의 주민이 총궐기하여 면사무소가 있던 화도면 마석우리로 행진하였다. 남궁우룡도 이틀 전 시위 계획이 발각됨에 따라 체포된 이재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행진을 시작할 때 200여 명에 불과하였던 시위 군중은 어느새 1,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에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며 독립 만세 운동을 탄압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이달용을 비롯하여 손복산(孫福山), 신영희(申榮熙),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중상자도 다수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새벽에는 김필규, 강선원(姜善遠), 윤준(尹俊), 김원석(金元石) 등 다수의 인사가 만세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남궁우룡은 1919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이어가다가 1919년 9월 17일 가출옥되었다.
남궁우룡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월산교회 앞마당에 1993년에 세운 3·1운동 기념비가 있어 남궁우룡을 비롯한 당시 화도면 월산리 만세 시위 참여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99번지에도 남궁우룡을 비롯하여 화도면 일대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남궁석은 1897년 1월 14일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0년 5월 전 북 정읍에서 김언수(金彦洙), 금광간일(金光干日)이 창시한 신종교에 입교하여 종교 활동을 수행했다. 그가 신봉한 신종교는 시천교와 증산교의 뜻을 기초로 하여 유, 불, 선의 3교를 통합 한 것으로, 신통력을 가진 도통군자가 되기 위해 수양해야 하고, 강증산의 유저대순전경(遺著 大巡典經)에 기초하여 ‘3재가 발생하여 부자, 지혜 있는 자, 권력계급은 대부분 죽어 없어지게 되며, 일본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은 멸망이 빨라지고 그때 도통군자 1만 2천명은 그 신통력에 의해 생존하고 조선은 독립을 얻게 되고 장래에 영구한 조선건국의 대 공로자로서 우대받게 된다’고 강조했다.
남궁석은 이러한 교리에 따라 신통력 있는 도통군자 12,000명을 모으기 위해 종교적 수양 및 교세 확장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2년 2월 17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포교 활동에 몰두하던 그는 1964년 6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남궁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현대 인물 .
기업인으로,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 회장 역임
1. 생애
- 1916년 서울 출생
- 일본 니혼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 1949년 극동해운 설립, 1959년 한국 석유 설립, 대표 취임
- 1962년~1963년 한국일보 사장, 1966년 금융통화위원
- 1968년 민영화된 대한조선공사 인수, 1988년까지 사장, 회장직 역임, 대형 선박 수출에 앞장서
1972년~1973년 연속 은탑 산업 훈장, 금탑 산업 훈장 수상, 1974년 '수출의 날' 포장자 선정
- 2006년 2월 2일 향년 90세 별세
2. 업적
- 남궁련은 대한조선공사를 이끌며 대한민국 조선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
- 그의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 조선업 시장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 남궁련은 조선업뿐만 아니라 중공업, 석유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약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3. 평가
- 남궁련은 대한민국 조선업의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업인 중 하나로 꼽히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으로, 메트로신문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1. 출생
- 생년월일: 194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2. 학력
- 연세대학교 졸업
3. 경력
- 2005년부터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회장
-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사장
- 2002년 브이오엔 대표이사 회장
- 1985년 정보산업협회 부회장
- 1976년 포철기업 사장
4. 수상 - 2013년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특별상
- 2012년 제19회 장한 고대언론인상
- 2011년 제48회 한국출판문화상 대상
5. 저서
- <메트로신문사 사장 남궁호의 경영 에세이> (2006년, 에세이퍼블리싱)
6. 기타
- 남궁호는 메트로신문사를 창간하여 10여 년간 이끌어오면서, 신문사의 발전과 함께 대한 민국 언론계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 그는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브이오엔, 정보산업협회, 포철기업 등 다양한 기업에서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였다.
- 남궁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라는 책을 출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경영에 대한 조언과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다.
남궁호는 대한민국의 언론과 기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업적과 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
1. 출생
- 1912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출생.
- 서울 철도중학교를 졸업.
2. 정치 경력
- 1945년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여군 위원장, 조선민족청년단 부여군 단장을 지냈다.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 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1948년 8월 7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 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지만 신병으로 인해 출마하지 못했다.
3. 사망
- 1986년 11월 24일 사망
남궁현은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공무원 출신 기업인
1. 출생
- 1938년 2월 28일, 경기도 용인
2. 학력
- 선린상업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 경력
- 중앙일보 입사, 동양방송 기획실장 등 역임
- 1975년 삼성전자 기획조정실장
- 1982년 사표 제출 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공부
- 1986년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근무
-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 PC통신(현 KT알파) 초대 사장
- 1993년 삼성그룹으로 돌아와 삼성SDS 사장
- 1998년 말부터 2000년 초까지 정보통신부 장관
-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용인시 갑 선거구에 출마 남궁석은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IT 산업 육성과 정보화 사회
구현에 기여하였으며, 삼성SDS 사장 시절에는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정치인
1. 출생
- 1942년 12월 20일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교촌리
2. 학력
- 서울 중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3. 경력
-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추진 협의회에서 활동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선거대책 본부 부대변인 역임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광명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 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
- 1997년 새 천년민주당 창당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
- 1998년 대통령 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임명
- 2000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2002년까지 재직
- 새 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열린우리당 고문 등 역임
남궁진은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특히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문화 예술과 관광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교육학자
1. 출생
- 1949년 9월 15일,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2. 학력
- 중앙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
3. 경력
- 관동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 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역임
4. 저서
- 교육의 역사 철학적 기초
- 교육학 총론
- 한국 개화기의 사회교육 연구
- 일제 침탈기의 민족 사회교육 연구
남궁용권은 교육학자로서 교육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한국의 사회교육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산부인과 의사
1. 출생
- 1956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
2. 학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석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박사
3. 경력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과장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의무부총장 겸 의무원장
경제 관료 출신
1. 출생
- 1951년 서울
2. 학력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 행정고시 10회로 공직에 입문
3. 경력
- 재정경제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 등을 추진하여 경제 안정화에 기여했다.
- 기획예산처에서는 예산총괄심의관과 재정기획국장 등을 역임하며 국가 재정의 효율적인 운용과 투명성 제고에 기여했다.
- 예금보험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부실 금융기관 정리와 공적자금 회수 등을 통해 예 금자 보호와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했다.
- 금융통화위원으로 활동하며 통화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참여했다.
남궁훈은 공직 생활 동안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쌓아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기업인으로, 아이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와 재단법인 게임인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1. 출생
- 1962년생
2.학력
- 서강대학교를 졸업
3.경력
- 카카오의 공동창업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 카카오게임즈의 대표이사를 거쳐 2022년 3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카카오의 대표이사를 역임하였다.
- 2023년 11월 아이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 2020년에는 제12회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게임산업 발전 유공 부문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 하였다.
게임인재단 이사장으로서 게임 산업의 발전과 게임 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게임 산업이 더욱 발전하고 건강한 게임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배우로 1999년 데뷔 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연 역할에 머무르며 무명의 시 절을 보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며 주연급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주연을 맡은 후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 '마이 시 크릿 호텔', '김과장', '스토브 리그', '검은 태양', '낮과 밤', '닥터 프리즈너', '365: 운명을 거 스르는 1년', '어느 날', '천원짜리 변호사' 등에 출연하며 주연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영화 '비정규직 특수 요원', '라이트 마이 파이어', '월색유인' 등에도 출연하며 스크린에서도 활약하였다.
2024년 제60회 백상예술대상 TV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고 2023년 MBC 연기대상 대상, 2023년 제36회 그리메상 최우수 연기자상, 2023년 제14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 총리 표창을 수상하였다.
남궁민은 연기력과 흥행력을 모두 갖춘 배우로 평가받으며, 대한민국의 대중문화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근세 전 인물 .
啓
이 단은 조선조 좌명원종공신 자헌대부 한성부윤 충청전라병마도절제사 남궁계(啓)를 추모 제향하는 단이다.
남궁계(啓)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이며 소부윤(少府尹) 우(祐)의 아들로 조선조에 음보로 등용되어 사과를 지내고 1401년(태종 1) 좌명원종공신 3등이 되었다. 1431년에 대호군에 올랐고 1426년(세종 8) 정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판의주목사가 되고 1435년 동지중추원사에 올랐다.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38년 한성부윤에 오르고 1443년 전라도절제사 1445년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1446년(세종 28)에 세상을 떠나니 세종께서 크게 애통하여 승지를 보내 문상하고 예관을 보내 상수를 내려 호상케 하였다. 배는 정부인 능성구씨로 후사가 없어 남궁좌(佐)의 셋째 아들인 치(致)를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
묘가 실전되어 제를 드리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자손들이 정성을 모아 1962년 10월 15일에 단을 만들어 높은 은덕을 영원토록 기리게 되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하고 있다.
佐
이 묘는 사온서승(司署丞)을 거쳐 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를 역임한 남궁좌(佐)와 배(配)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유택이다.
남궁좌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으로 고조 신(信)은 고려국자감 진사로 충숙왕조에서 벽상1등공신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고, 증조 진(瑨)은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이고, 조부 기(起)는 민부상서(民部尙書) 집현전제학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복(福)은 사복시판사(司僕侍判事)이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가 사온서승을 거쳐 지간성군사를 지냈고 정(政)·효(效)·치(致) 3남을 두었는데 10촌 병사공 계(啓)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셋째 치(致)를 입양계승하여 그 손이 번성하니 오늘의 함열남궁씨를 이룩하였다.
불행하게도 장남 정(政)이 무자하고 차남 효(效)도 6대손에서 절손되었으므로 시묘봉양(侍墓奉養)치 못하게 되어 출계 후손이 정성껏 봉제 수호를 하고 있다. 묘는 쌍봉으로 해좌에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致
이 묘(墓)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역임하고 병조참의(兵曹議)에 증직된 남궁치(致)의 유택이다.
남궁치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시조 원청(元淸)의 14세손으로 간성군사 좌(佐)의 셋째 아들이나 태종때 좌명원종 공신에 책록되고 대호군에 올랐으며 전라도절제사를 지내고 중추원부사에 이른 계(啓)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박천군수에 올랐다. 중종반정으로 손자인 찬(璨)이 복권될 때 같이 통정대부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옥천김씨(沃川金氏)이며 사향(巳向)으로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이조참판 순(順)을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順
이 묘는 이조참판(吏曹判)에 증직된 남궁순(順)과 배(配) 증 정부인(貞夫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순은 시조 원청(元淸)의 15세손이며 군수(郡守) 치(致)의 아들로 세종조에 출생하여 사마시에 급제하고 예부생원(禮部生員)으로 청렴 결백한 선비로 고고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 남궁찬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복권되어 증직을 받을 때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배 철원최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다. 특히 정부인 최씨는 청빈한 가문을 지키며 유복자 찬(璨)을 정성으로 가르쳐 강직한 공인으로 바르게 살게 하였으며 남궁씨(南宮氏) 문중을 중흥시키는 중조로서 자손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다. 부인은 높은 벼슬로 출세하는 것보다 자손이 번성하기를 염원하더니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켜 외아들 찬(璨)이 4남을 두어 대를 이어 번성하게되니 오늘의 남궁(南宮)씨는 단본이며 모두 한 자손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璨
이 묘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호은(壺隱) 남궁찬(璨)의 유택이다. 남궁찬은 자가 숙헌(叔獻) 호는 호은(壺隱)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증 이조참판 순(順)의 아들로 1453년(단종 1)에 출생했다.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경상도 도사·제주목사·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 등 제현을 신구하려는 상소를 극간했다가 용안에 유배되고 1504년(연산 10)에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에 어울리게 삼사사관(三司四館)에서 국사에 임하였고 후손들은 청족(淸族)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맑은 그 삶을 본으로 하고 있다. 유배길에 지은 묵죽(墨竹)과 묵매(墨梅)의 시서는 대가를 이루었다.
왕명으로 오늘의 자리에 안장되었고 묘전의 문관석은 크기가 웅장하고 모양이 특이한데 그의 충의심에 감격한 명의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명나라에서 제작하여 왔다고 전한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재 격이다. 배 정부인 안동김씨는 무후하고 계배 정부인 평산신씨에게 4남을 두었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璨
이 비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오위도총관·행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남궁찬의 신도비이다.
이 비는 1957년 9월 국가에 남긴 공적과 충절의 정신을 길이 계승하기 위하여 후손들의 정성으로 건립하였다.
남궁찬(璨)은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중시조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빈하여 나라에는 충(忠)으로, 부모에게는 효(孝)로, 정사에는 의(義)로 임하였다.
호는 호은(壺隱)이고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전북 익산의 용안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필(弼)·익(翼)·숙(淑)·열(說)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弼
이 묘는 조선 때 현감을 지낸 남궁필(弼)과 배 숙인(淑人) 강화최씨(江華崔氏)·배 숙인(淑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필은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의 17세손이자 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찬(璨)의 장남으로 1475년(성종 6)에 출생했다.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아버지 남궁찬이 연산군의 폭정을 상소하다가 익산시 용안(龍安)으로 유배되니 그 뒤를 따라가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인한 병이라 치유되지 못하고 상을 당하니 애통·비감해 하며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그 뒤로는 스스로 산수주인(山水主人)이라 칭하며 예·악을 즐기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중종반정으로 부친이 사면되면서 고창현감의 관직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가숙제의도(家塾祭儀圖)』가 있다. 묘는 강화최씨와 합봉하였고 철원최씨는 왼쪽에 쌍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翼
이 묘는 통훈대부 임피현령을 역임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判)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된 남궁익(翼)과 배위 정부인 연안김씨의 유택이다. 남궁익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으로 부제학 찬(瓚)의 둘째 아들이며 1480년(성종11)에 출생하였고 호는 익지(翼之),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선친의 유언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40세에 음보로 관직에 나가 한성부 랑관, 수운판관, 동복현감, 임피현령을 지냈으며 부친 찬(瓚)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증직될 때 그도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슬하에는 교리 희(憘), 자헌대부 한성판윤 침(沈), 지평현감 기(愷)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淑
이 묘는 한성판윤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남궁숙(淑)과 배 정부인 완산이씨와 계배 정부인 고흥류씨와 삼합봉(三合封)이다.
남궁숙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이자 부제학 남궁찬(璨)의 셋째 아들로 1490년(성종 21)에 출생했다. 자는 숙부(淑夫), 본관은 함열로 선친의 억울한 죽음에 비분절통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형인 필(弼)과 익(翼)의 권유를 받아 1528년(중종 23) 뒤늦게 생원이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안산군수·성주목사에 이어 홍문관부정자·지평(持平)·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상호군(上護軍)·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한성부우윤·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동지 중추부사에 올랐다.
안산군수·성주목사 재임시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생활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슬하에는 연안부사 제(悌)와 승지 회(恢)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후손들이 추모 향사를 지낸다.
淑
이 신도비는 정헌대부 한성판윤을 역임한 남궁숙(淑)의 신도비이다. 남궁숙(淑)은 자가 숙부(叔夫)이고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부제학 남궁찬(璨)의 아들로 1528년(중종 23)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1536년 홍문관 부정자에 이어 지평·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가 되었다.
황해도·전라도·함경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정헌대부,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이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영을 위로하는 뜻으로 성심을 모아 1982년 비를 세웠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淑
이 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남궁숙(淑)의 선정비로 고을 백성 등을 위해 많은 치적선정을 하여 1547년(명종 2)에 건립하였다.
남궁숙(淑)은 자는 숙부(淑夫)이며 강원도관찰사 남궁찬(璨)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에 생원(生員)이 되고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박사에 임명되고 1536년(중종 31)에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지평(持平)·사간(司諫)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그 후 상호군(上護軍)과 황해도관찰사, 1550년(명종 5)에 전라도관찰사, 다음해에 한성부윤이 되고 1552년 (명종 7)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불취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전직되었다.
그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직시 백성을 다스리며 실천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첫째, 옛 폐단을 고쳐 정사를 새롭게 하고 둘째,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낭비를 없애고 절약하였으며 셋째, 백성을 사랑하고 송사는 명철하게 판단처리 하였다.
그가 1546년(명종 원년)에 병을 얻어 이임하니 그에 대한 고을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담아 비를 세웠다. 비문 끝절에 "공경하도다 공이여 우리 향토에 사랑을 주시었도다. 우리는 돌에 글로 새겨 영세토록 잊지 않으려고 명종 2년 정월에 이 비를 세우노라"고 기록하였다.
厚
이 묘(墓)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참봉공파조( 奉公派祖)인 진사 남궁후(厚)와 배위 공인전의이씨(恭人全義李氏)의 유택이다. 남궁후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고창공(高敞公) 남궁필(弼)의 둘째 아들로 1502년(연산군 8)에 출생하였으며 함열남궁씨의 7파조 중 참봉공파조이다.
한때 진사의 직에 나갔으나 관직이 없고 오로지 학문을 숭상하고 즐기며 후진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참봉의 직을 내렸으나 끝내 하지 않았으며 다만 고고한 선비로 살다가 향년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전의이씨이며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통덕랑 저(著), 차남은 경상도 도사·사성 지(芷), 삼남은 참봉을 지낸 무(茂)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憘
이 묘(墓)는 조선조때 교리(校理)를 역임한 남궁희(憘)와 배위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를 합봉한 유택이다.
남궁희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자 현령 남궁익(南宮翼)의 장남으로 1510년(중종 5)에 출생했다. 자는 구중(懼仲)이며 함열남궁씨 7파조 중 교리공파조(校理公派祖)이다.
30세에 초시를 거쳐 진사(進士)에 오르고 3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예문관검열, 대교, 홍문관 수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은퇴하고 1595년(선조 30)에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청풍군수 활(活)을 두었다. 묘는 선고(先考)의 묘 아래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5일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이 묘는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한 남궁침( )과 배위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유택이다. 남궁침은 자가 성중(誠仲)이며 본관은 함열(咸悅)로 1513(중종 8)에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관찰사 찬(璨)의 손자이며 현령 익(翼)의 차남으로 출생 대사성공파의 파조이다.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고 1544년(중종 39)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48년(명종 3) 이조좌랑, 다음해 사인이 되고 1552년 경상도 암행어사·직제학·우부승지, 다음해에 좌승지를 지내고, 1557년(명종 12)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후 판결사(判決事),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564년 전라도 관찰사·형조참판·함경도 관찰사, 1566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슬하에는 직장 길( ), 영광군수 견( ),직장 식(湜), 건( ), 가선대부 도지중추부사 영(泳) 등 5형제를 두었다. 묘는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와 합봉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愷
이 묘는 통훈대부 지평현감을 역임한 남궁기(愷)와 배 숙인(淑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유택이다.
남궁기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현령공(縣令公) 남궁익(南宮翼)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낙중(樂仲),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1517년(중종 12)에 출생했고, 함열남궁씨 7파조 중 지평공파조(砥平公派祖)이다. 23세때 과거에 등과하여 생원 진사에 오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현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인 전주이씨이며 슬하에 통덕랑 도(渡), 예부생원 준(濬), 무관 만호 판관 섭(涉)의 3형제를 두었다.
묘는 합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悌
이 묘는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김천군수·배천군수·연안부사를 역임한 죽계(竹溪) 남궁제(梯)와 배 숙부인(淑夫人)풍천임씨(豊川任氏)의 유택이다. 남궁제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 숙(淑)의 아들로 1543년(중종 38)에 출생했다. 자는 중우(仲友),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함열이다. 함열남궁씨의 7파조중 연안공파조(延安公派祖)이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 급제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1572(선조 5) 평강현령, 진감현감, 의령어사를 지내는 동안 치적이 있어 왕으로부터 "거관근검부역평균(居官勤儉賦役平均)"이라는 여덟자를 포상받았다. 그 후 사섬시정을 거쳐 김천·백천군수, 평산·연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전조사(轉漕使)로서 군수물자 수송에 공을 세웠다.
슬하에는 장남 계공랑 행(荇) 차남 사무음사 명(蓂), 3남 함경순변사 헌(憲),4남은 주부 협(莢)을 두고 묘는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恢
이 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남궁회(恢)의 유택이다.
남궁회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숙(淑)의 아들로 1546년(명종 1)에 출생하였다. 자는 군곽(君廓)이며 8세에 선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관직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학문연마에만 전념하였고 효심 또한 극진하였다.
높은 경륜과 덕망을 인정받아 교관에 임명하였으나 수락하지 않았고 다시 금오랑(金吾郞)에 명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어머님을 모시고 강원도 홍천군 월운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이며 묘는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발(發), 진(盡), 급( )의 3형제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추모향사를 지낸다.
崇
세보(世譜) 18세. 호(號)가 모현재(慕賢齋)로 습독공(習讀公)의 4자(四子)로 태어나셨으며 모현공파(慕賢公派)의 파조이시다.
위로 세 분의 형님이 계셨으나 모두 후손이 끊어지고 공만이 습독공의 후사(后嗣)를 이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크게 번창하였다.
1975년 병진대보(丙辰大譜) 수보(修譜) 때 처음으로 공의 후손을 모현공파로 분리하여 공이 파조(派祖)가 되셨으며 우리 남궁씨(南宮氏)는 6파에서 7파로 늘어났다.
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만세곡(萬世谷) 선영국 내에 단비(壇碑)를 모셔 치제(致祭)하고 있다.
근세 인물 .
한서(翰西) 남궁억은 구한말(舊韓末) 기울어가는 국운을 세워보려고 관계에서 정계에서 또한 언론계에서 정열을 바쳐 싸웠고 종교·교육 및 비밀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다.
1863년 12월 27일 한성 왜송골에서 출생하였으며 호(號)는 한서(翰西)로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사숙한학(私塾漢學)을 수학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20세때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후 내부주사(內府主事)로 임관되어 고종황제의 어전통역(御前通譯)으로 활동하고 1887년 영국·독일·러시아 등 외국순방에 참여하였으며 1889년 궁내부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어 4년간 고종황제를 시봉하였다.
칠곡부사로 임명되었다가 1896년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한 독립협회 수석총무와 서법요원이 되어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우고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하여 대역부도 죄로 몰아 남궁억, 이상재, 방한덕 등 18명을 투옥하였다. 얼마 후 고종의 특별은사령(特別恩赦令)으로 석방되었으나 1898년 독립협회는 종말을 고하고, 동년 9월 5일 윤치호, 장지연, 이상재, 라수연 등과 손을 잡고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일간신문으로 발행하였다.
남궁억 무궁화
시비(南宮檍 無窮花詩碑)
이 시비(詩碑)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한서(翰西) 남궁억(檍)의 무궁화시비이다.
남궁억은 시조 원청(元淸)의 30세손으로 중추도사 영(泳)과 배(配) 덕수이씨와의 12남매 중 외아들로 1863년(철종14)에 출생했다.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는 한서(翰西)이다. 20세때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22세에 고종황제의 통역관이 되어 다재다능(多才多能)한 능력이 인정되어 23세에 내부주사의 관직을 받아 칠곡부사·성주목사·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내부토목국장때에는 정동 육조와 남대문사이 광화문길을 확장하고 파고다공원을 만드는 등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총무직을 맡아 독립신문 발간·독립문 건립·황성신문 창간 무궁화의 국화지정에 힘썼다. 1933년 무궁화당 사건으로 투옥, 1939년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일가들이 정성을 모아 무궁화노래를 새겨 독립기념관에 시비를 세웠다. 그 때가 1988년이며 자녀는 초대뉴욕총영사 염(炎)과 2녀를 두었다.
그의 업적을 보면 첫째, 황성신문사장·광동학회장 등 언론활동을 하였고 둘째, 무궁화를 국화로 제정하고 무궁화자수본 등으로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셋째, 양양현산학교와 홍천모곡학교를 창립하고 배화학당(현 배화여고)과 상동청년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넷째, 서예의 대가(大家)로 궁체를 보급하고 다섯째,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차례 투옥생활을 하였고 여섯째, 저서로는 동사략·조선이야기·가정교육 등 10여편과 무궁화노래·기러기노래·일하러가세 등 많은 노래를 지어 보급하였다.
구한말 5대 시인 휘 벽(壁)
公은 세보상(世譜上) 32世이며 대사성공(大司成公) 무편(戊編)에 속(屬)한다. 號는 초몽(草夢)이고 인천 강화(江華)에서 아버지 훈(薰)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一男一女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였다. 1894年에서 1921年 까지 시인(詩人)으로서 짧은 삶을 살았다.
1912年 서울 한성고등보통학교(漢城高普)를 졸업(卒業)하고 오산중학교 교사(敎師)로 잠시 재직(在職)하였다.그 뒤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협회(東京音樂協會) 간사(幹事)로도 있었으며,1920年에 창간(創刊)된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변 영로(卞 榮魯), 오 상순(吳 相淳), 염 상섭(廉 想涉) 等과 교분(交分)하던 구한말(舊韓末) 5大 시인(詩人)으로 꼽히는 천재(天材)이기도 하나 너무 짧은 생애(生涯)가 가슴아프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彊會月報) 1907年 1월號에 투고(投稿)하였던 애국설(愛國設)에서 당시(當時) 지도층(指導層)의 각성(覺醒)과 청소년교육(靑小年敎育)의 중요성(重要性)을 촉구(觸具)하기도 하였다.
작품 활동(作品 活動)은 主로 "청춘"과 "폐허" 및 "조선일보" 일본잡지인 "태양"을 중심(中心)으로 전개(展介) 되었는데, 일어(日語) 및 영어(英語)로 된 시(詩)와 수필(隨筆)도 있다. 1918年 "청춘"에 "孤獨은 너의 運命이다" 等 5篇의 일문시(日文詩)와 "나의 세상" "나의 사랑" 等 2篇의 영문시(英文詩)가, "폐허(閉墟)"에는 수상(隨想) "자연(自然)"(1920), "풀"(1921), "생명의 비의(生命의 秘義)"(1921) 등 4篇의 詩, 조선일보(朝鮮日報)에는 "신비의 인연(神秘의 因緣)", "출생(出生)" 等 7篇의 詩가, 1922年 "신생활"에는 "별의 아픔", "마(馬)" 等 5篇의 유고시 및 일기(日記)가 실려있다. 27歲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작품 수(作品 數)가 극히 한정(限定)되어 있으나, 얼마 남기지 못한 유작(遺作)들은 한국근대(韓國近代) 시사(詩史)에서 특이(特而)한 시세계(詩世界)를 보이고 있다. 卽, 유년기(幼年期)의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관념(觀念)과 초기시(初期詩)에서 보이는 미(美)와 우주적(宇宙的) 조화(調和)를 포함한 다양성(多樣性), 그리고 "폐허"지로 부터 본격화(本格化)한 시작(詩作)들이 지니는 사상(思想)이 시적(詩的) 특색(特色)이 되고 있다.
그의 문학(文學)은 당시(當時) 우리 문단(文壇)에 만연(蔓延)되고 있었던 병인적(病因的) 퇴폐성(退閉性)이나 감상(感想)에 물들지 않고, 그 나름대로 자연(自然)의 순실미(純實美)와 ‘생명의 비의’와 대지사상 等을 추구(追求)한 것 等을 특색(特色)으로 들 수 있다.
단학자(丹學者) 諱 두(斗)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고려벽상공신(高麗壁上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역임(歷任)하신 諱 신(信)公의 9代孫이시고 간성공(杆城公)의 5대손(五代孫)이시다. 中宗 十一年(1526年)에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에서 아버지 諱 집(緝)公의 長男으로 비 교적(比較的) 부유(富裕)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1555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給第)하여 진사(進士)가 되tl고 그의 비범(非凡)한 재주와 문장(文章)이 성균관(成均館)에 까지 명성 (名聲)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그의 詩를 즐겨 외웠다.
公은 서울로 집을 옮기고 시골에는 첩(妾) 한 사람을 두어 매년(每年) 추수(秋收)를 하여 올려가곤 하였는데 妾은 절세미모(絶世美貌)에다 재주까지 비범(非凡)하여 그림과 글씨에 무불능통(無不能通)하니 公께서 지극(至極)히 총애(寵愛)하셨다. 그러나 妾이 이성(異姓)의 조 카와 간통(姦通)하는 것을 목격(目擊)하고 두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인 後 금대산(金臺山)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에 머물다가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의령야암(宜寧野菴)이라는 암자(庵子)에 머물게 되었다.그러던 어느날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도교(道敎)의 방술(方術)이 뛰어난 노승(老僧)이 무주(茂州) 치상산(稚裳山)의 어느 암자(庵子)에 기거(起居) 한다는 소식(所息)을 접(接)하시고 무주(茂州)에 있는 치상산(稚裳山)으로 찾아가서 그 노승(老僧)을 만나 신선술(神仙術) 수련(修練)에 입문(入門)하게 되었다. 수련과정(修練過程)은 정신통일(精神統一)을 위하여 잠 안자는 法과 곡기(穀氣)를 끊는 法을 익히고 이를 응용(應用)하여 내단수련(內丹修練)의 극치(極致)인 신태(神胎) 일보직전(一步直前)까지 도달(到達)하였다고 한다.
한 때는 오성(鰲城) 이 항복(李 恒福)이 젊었을 때 80이 넘은 公을 만나 감탄(感歎)하며 “선생(先生)께서는 90이 다 되셨는데도 정력(精力)이 젊은 사람 같으니 어떤 비방(秘方)을 쓰십니까”라고 질문(質問) 하였다고 류 광익(柳 光翼)의 저서(著書)인 사암집화(私岩輯話)에 소개(紹介)되기도 한다.이 수광(李 수光)은 그의 저서(著書)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소개(紹介)하기를 "언제나 명산 대천(名山 大川)을 떠 돌아다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가히 지선(地仙 : 땅위에 사는 神仙)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는 뛰어난 단학자(丹學者)로서 신선술(神仙術)의 대가(大家)이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위험(危險)에 처하여 피신(避身)한 젊은 충무공(忠武公) 이 순신(李 舜臣)을 만나 자식같이 돌보며 심신(心身)의 연마(硏摩)와 무예(武藝)를 가르쳐 후일(後日) 구국(求國)의 명장(名將)으로 왜적(倭敵)으로부터 조선(朝鮮)의 바다를 지켜 나라를 求하게 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조선 중기(朝鮮 中期)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때의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 두 선생전"은 "홍길동전"과 함께 쌍벽(雙壁)을 이루는 소설(小說)이다. 슬하(膝下)에 외아들 인(引)을 두었으나 불행(不幸)하게도 그 後에 기록(記錄)이 없어 아쉬움을 금(禁)치 못한다.
주: 참고문헌(參考文獻)으로는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과 신선단학(神仙丹學), 류 광익(柳 光翼)이 지은 사암집(私岩輯)과 류 몽인(柳 夢寅)이 지은 야담선도부(野談仙道部)가 있다.
해운과 조선의 대부 련(鍊)
남궁이 해냈어!
6.25 전쟁(戰爭) 中이던 1952年 10月 21日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임시(臨時) 수도(首都) 부산(釜山)에서는 감격적(感激的)인 사건(事件)이 벌어졌다.1만 680톤 중량(重量)의 한국(韓國) 국적(國籍) 화물선(貨物船) 미스코리아號가 미국 서해안(美國 西海岸)의 포틀랜드港을 向하여 부산항(釜山港) 제 1 부두를 출항(出航)하는 일이다.
출항식(出航式)에 참석(參席)한 리 승만(李 承晩) 대통령(大統領)은 테이프를 끊기 전에 선내(船內)를 둘러보면서 박 옥규 선장(後에 海軍參模總長 歷任) 이하(以下) 항해사(航海士)와 기관사(機關士)들에게 흥분(興奮)된 어조(語調)로 “자네들, 이 배를 몰고 정말 미국(美國)에 갔다 올 수 있나?” 라고 물었다. “각하(閣下), 염려(念慮)하지 마십시오. 자신(自信) 있습니다.” 선장(船長)은 힘차게 대답했다. 李 大統領은 매우 흐뭇한 표정(表情)으로 일일이 선원(船員)들의 등을 두들겨 주며 격려(激勵)하였다.
李 大統領으로서는 일만톤급 한국(韓國) 국적(國籍)의 화물선(貨物船)이 가득히 고철(古鐵)을 싣고 대미(對美) 항로(航路)에 취항(就航)하는 것이 여간(如干) 대견스럽지 않았다. 대통령(大統領)은 큰 목소리로 “南宮이가 해냈어! 기어이 해냈어!” 라고 감격(感激)에 벅찬 말을 연발(連發)하였다. 大統領의 얼굴은 상기(上氣)되었고 더욱 흥분(興奮)되었다. 이 날의 주인공(主人公) 미스코리아 號의 선주(船主)는 극동해운㈜의 사장(社長), 38歲, 신장 180㎝의 당당한 체구(體驅)의 미남청년(美男靑年) 일본대 경제학부(經濟學部)를 졸업한 남궁 련(南宮 鍊)이었다. 당시(當時)에는 1만톤급 대형 화물선(大形 化物船)의 보유(保有) 국가(國家)가 다섯 나라도 안되었으며 일본(日本)도 갖지 못한 상태(狀態)였다.
1946年에 극동기업㈜을 출발(出發)로 사업(事業)을 시작(始作)하고 1949年에 극동해운㈜을 설립(設立)하여 3年 後에 이런 위대(偉大)한 일을 해내었으니 참으로 어른의 안목과 능력은 경이로운 바 있다. 그 후 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우리 나라 해운의 종가격인 대한해운공사의 사장(社長)으로 한국(韓國) 해운(海運)의 개척자(開拓者)의 자리에 당당히 임하게 되었다. 1958년 한국석유㈜를 설립(設立) 정부(政府)의 요청(要請)으로 울산에다 석유화학단지(石油化學團地) 건설(建設)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樹立)하고 대규모(大規模) 정유공장(精油工場)을 건설(建設)하기 위한 교섭차(交涉此) 도미(渡美)하였는데 4.19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좌절(挫折)의 큰 아픔을 안게 되었다.
5.16 이후에는 한국경제인협회(全經聯의 前身) 부회장(副會長)으로 군사 정부(軍事 政府)의 경제개발정책(經濟開發政策)에 적극(積極) 참여(參與)하고 한국종합제철㈜ 이사, 경제심의회 의원, 금융통화위원으로 활약(活躍)하면서 울산을 공업기지(工業基地)로 선정(選定)하는 많은 아이디어를 창출(創出)하여 제공(提供)하였다. 1968년에는 박대통령의 요청(要請)으로 노사 분규(勞使 紛糾)와 적자경영(赤子經營)으로 파산(破産) 직전(直前)인 대한조선공사를 인수(引受)하여 20년간 사장, 회장을 역임(歷任)하였으며 1973년에 온 재산(財産)을 투입(投入)하여 옥포에 조선소(造船所)를 건설(建設)하여 박대통령 임석하(臨席下)에 발주식(發注式)을 거행(擧行)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세계적 규모(世界的 規模)의 시각(視覺)을 가진 기업인(企業人)이었으며 한국(韓國)의 기적(奇蹟)은 곧 우리 해운(海運)과 조선(造船)에 의해 선도(先導)되었다 해도 결코 과언(過言)이 아니다. 바다와 함께 배와 함께 오로지 나라의 경제 재건(經濟 再建)을 위해 한 평생(平生)을 다 바치신 거인(巨人)이요, 자랑스러운 남궁(南宮)의 후손(後孫)이다.
그냥 좋아서
특기(特記)해야 할 일은 취미(趣味)로 즐겨 하셨던 컬렉션 이야기다. 고미술(古美術)에 관심(關心)을 가지시고 그냥 좋아서 모은 것이라는데 소장(所藏)한 것이 무려 3,000점이나 된다는 사실(事實)이다. 그 중에는 불상(佛象), 금관(金冠), 금채도기(金彩陶器) 등 진귀(眞貴)한 것들이 많고 국보(國寶)로 지정(指정)된 것, 국보급(國寶級), 보물급(寶物級)에 비견(比肩)할 만한 것이 상당수(相當數)이다. 또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 유물(遺物)이 800여점, 수백점의 탈 등 재미있는 물건(物件)과 대단한 物件들이 고루 있어 한국미술사(韓國美術史)를 바꾸어 놓을 만큼 귀중(貴重)한 것들이라는 중평(重評)이다.
代를 이은 종사(宗事)에 헌신(獻身)
27世 諱 복의 3男 1女 중 3男으로 1915年에 양주(陽州) 루원(樓院 : 現 방학동)에서 출생(出生)하였으며 호(號)는 강석(江石)이시고 항렬(行列)은 28世 윗 금(金)이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종사(宗事)를 도우셨다.
노중련(魯仲連) 諱 흔(炘)
公께서는 선조(宣祖) 38年(1605年)에 아버지 諱 부와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4男 1女 中 4男으로 출생(出生)하시었고, 중부(仲父)이시며 통정대부 음사(通政大夫 蔭仕),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돈녕부 직장(敦寧府 直長), 무주현감(茂州縣監)을 지내신 諱 격(格)公에게 입양(入養)되어 교리공(校理公) 병편(丙編) 21世로 代를 이으셨다.
字는 회이(晦而)이시고 관직(官職)은 통사랑(通仕郞)에 올랐으며 덕행(德行)과 학문(學文)이 뛰어나 칭송(稱頌)을 받았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因)하여 인조(仁祖) 임금이 삼전도(三田度 : 지금의 송파)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무릎 꿇고 항복(降伏)하는 것을 보고 비분애통(비분애통)하시고 한비(汗碑 :오랑캐의 碑石)가 세워지니 그 땅을 더럽게 여겨 105결(結: 30萬坪)의 토지(土地)의 재산권(財産權=文書)을 불사르고 다시는 자기 소유(所有)로 삼지 않았으며 생각하지도 않고 의연(毅然)히 강원도 홍천 모곡으로 은거(隱居)하여 한 生을 마감하시니 세인(世人)들은 그를 칭송(稱頌)하여 노중련(魯仲連 :魯나라의 學者)과 같은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배위(配位)는 현풍 곽씨(玄豊 郭氏)와 장수 황씨(長水 黃氏)사이에서 3男 5女를 두시니 長男은 장연부사(長淵府사) 諱 후, 次男은 諱 무, 3男은 諱 서 이며 5女는 이 지학(李 志學), 신 준(申 準), 강 여위(康 汝衛), 윤 익준(尹 益雋), 윤 흥일(尹 興一)이다. 효종(孝宗) 7년(1656年)에 향년(享年) 52歲로 타계(他界)하셨다. 墓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동막골 선영하(先塋下) 亥坐에 모시었다.
근세 분야별 인물 .
독립운동가1 무궁화의 사람 억(檍)
公은 세보상(世譜上) 30世이시며 1863年 서울 왜송골에서 아버지 중추도사(中樞都事) 諱 영(泳)과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 李氏)의 12남매(男妹)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였다. 字는 치만(致萬), 號는 한서(翰西)이시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나 학업(學業)에 대한 열정(熱情)과 큰 꿈은 버릴 수 없었다.
1. 관력(官曆)
1884年(高宗21年)에 영어(英語) 학교(學校)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修了)하고 총해관(總海關)의 견습생(見習生)으로 있다가 1886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다. 1887年 전권대신(全權大臣) 조 민희(趙 民熙)의 수행서기관(隨行書記官)으로 영국,러시아,독일의 순방(巡訪)하고 돌아와 궁내부별군직(宮內府別軍職)을 거쳐 1893年에는 칠곡 군수(漆谷 郡守)를 지내셨다. 1894年 갑오경장(甲午更張) 내각(內閣)에 내부토목국장으로 중용(重用)되어 서울 종로(鐘路)와 정동(貞洞)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道路)를 정비(整備)하는 동시(同時)에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2. 독립(獨立),애국(愛國) 계몽운동(啓蒙運動)
1896年 2月 아관파천(俄館播遷) 後에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그해 7月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創立)하여 중앙위원,서기 사법위원,평의원 등에 선출(選出)되고 고위지도자(高位指導者)로 활동(活動)하였으며,독립협회(獨立協會)의 기관지(機關紙)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의 발행(發行)에도 참가(參加)하였다.
1898년 9月 나수연(羅壽淵), 유 긍等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創刊)하고 사장(社長)에 취임(就任)하여 국민(國民)을 계몽(啓蒙)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활동(活動)을 적극(積極) 지원(支援)하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체제(政治體制)를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로부터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개혁(改革)하여 의회(議會)를 설립(設立)하고 대대적(大大的) 개혁(改革)을 단행(斷行)하려는 독립협회운동의 지도자(指導者)로 활동(活動)하다가, 1898年1月에 17명의 지도자(指導者)와 함께 붙잡혔다.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해산(解散) 當한 뒤 1900年 7월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러시아와 일본(日本)의 한국분할설(韓國分割說)을 외국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침략야욕을 폭로(暴露)하고 경각심(警覺心)을 촉구(促求)하는 논평(論評)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拘禁)되었다.
또한,1902년 5월 《황성신문》에 일본이 갑오년(1894年) 동학운동 이래(以來)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러일협정의 침략적 성격(性格)을 논박(論駁)한 사설(社說)을 실었다가,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구속(拘束)되어 심한 고문(拷問)을 받고 4개월 만에 석방(釋放)되었다. 1903年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社長) 남궁 억(南宮 檍)과 총무(總務) 나 수연이 일본(日本)에 망명(亡命)해 있는 박 영효(朴 泳孝) 등과 공모(共謨)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謀陷)하여 다시 경무청(警務廳)에 구속(拘束)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4개월(四個月) 뒤에 석방(釋放)되었다. 출옥(出獄)한 뒤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직(社長職)을 사임(辭任)하였다.
1905년 3월 고종(高宗)의 간곡(懇曲)한 요구(要求)로 다시 관직(官職)을 맡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赴任)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일본이 1905년 11월 무력(武力)으로 위협(威脅)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强制)로 체결(締結)하고 국권(國權)을 박탈(剝奪)하자 통분(痛憤)하여 職을 사임(辭任)하고 또다시 귀경(歸京)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06年 2月에 다시 양양군수(襄陽郡守)에 임명(任命)되자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에 참가(參加) 하여 1907年 7月에 양양(襄陽)의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設立)하고 구국교육(求國敎育)을 실시(實施)하였다. 1907年 일본이 헤이그 특사사건(特使事件)을 구실로 고종(高宗)을 강제(强制)로 양위(讓位)시키고 정미 칠조약(丁未 七條約)을 체결(締結)하여 침략전쟁(侵略戰爭)을 강화(强化)하자 또 다시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상경(上京)하였다.
1907年 11月 권 동진, 여 병현, 유 근, 이 우영, 오 세창, 윤 효정, 장 지연, 정 운복, 홍 필주,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創立)하고 회장(會長)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展開)하였으며 그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4월 강원도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를 창립(創立)하여 회장(會長)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發行)하였다. 1910년8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합(倂合)하자 새 세대교육의 현장(現場)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해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敎師)가 되었고, 1912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원장(院長)을 겸하면서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鼓吹)시키고,
3.낙 향(落鄕)
1918年 건강(健康)이 악화(惡化)되어 친지(親知)들의 권고(勸告)에 따라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에 낙향(落鄕)하여 1919年 9月에 모곡학교를 설립(設立)하였다. 모곡학교에 무궁화묘포(無窮花苗圃)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의 보급운동(補給運動)을 전국에 걸쳐 전개(展開) 하였다.또한 애국적(愛國的) 찬송가(讚頌歌)를 만들어 전국(全國)의 교회(敎會)와 기독교계(基督敎係) 학교(學校)에 보급(補給)하였다.
1933年 11月 기독교계열(基督敎系列)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비밀결사조직(秘密決死組織)인 십자가당(十字架當)을 조직(조직)하여 활동(활동)하다가 일본경찰(日本警察)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投獄) 되었다. 노령(老齡)이 참작(參酌)되어 석방(釋放)되었으나 일본경찰로부터 받은 잔혹(殘酷)한 고문(拷問)의 여독(餘毒)으로 별세(別世)하였다.1977年에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에 추서(追敍)되었다.저서(著書)로는《동사략 東史略》《조선이야기》《조선의노래》《기러기 》《무궁화 동산》등이 있다.
독립운동가2 신학박사 1호 혁(爀)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며 교리공 병편(校理公 丙編)에 속한다. 아버지 단(檀)씨와 어머니 풍천 임씨(豊川 任氏)의 2男 中 長男으로 1882年 5月16日에 서울에서 출생(出生)하셨다. 1900年에 배재학당(現 培材高)을 졸업하시고, 그 後 평양신학교에 재학(在學)하면서 비어드와 신학교 교재(敎材) 번역(飜譯)에 헌신(獻身)하고 1921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留學)하여 프린스턴 신학부에서 M.A학위를 받고 1925년에는 리치먼드 유니온 신학교 연구과(硏究科)를 수료(修了)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26歲의 젊은 나이로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신학박사(神學博士) 학위(學位)를 받았다. 귀국(歸國)하여 모교(母校)인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수(神學敎授)가 되고 목사(牧師) 안수(按手)도 받았으며 24년간 봉직(封職)하다가 일제(日制)의 신사참배(神社參拜) 반대(反對) 문제(問題)로 학교가 폐교(閉校)되니 1939년 상해(上海)로 망명(亡命)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참여(參與)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성경(聖經) 주석(註釋)에 전념(專念)하였으며 1946년 해방(解放)과 더불어 귀국(歸國)하여 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선교활동(宣敎活動)을 하고 기독교 방송국 설립(設立)을 위하여 노력(努力)하던 중 6.25 전쟁(戰爭)이 발발하여 동년(同年) 8月 3日에 공산군에게 납북(拉北)되어 그 곳에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生을 마치시니 영영 고향(故鄕)땅을 밟지 못하셨다.부인(婦人)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로 남편(男便)과 같이 사회운동(社會運動)과 선교활동(宣敎活動)에 기여(寄與) 한 바 크다.
슬하(膝下)에는 7男과 2女를 두었는데 곧 長男 요한(堯漢), 次男 요섭(堯攝),3男 요세(堯世),4男 요설(堯卨), 5男 요직(堯稷),6男 요백(堯伯),7男 요숙(堯叔)과 2女는 차광조와 정현웅(요안나氏의 夫君)씨이다.2男 요섭의 세째 아들 건(鍵)씨는 북한(北韓) 외교통(外交通)으로 남북대화(南北對話)에 큰 활약(活躍)을 하였다.
독립운동가3 항일 언론인 훈(薰)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시며 대사성 무편(大司成 戊編)에 屬한다. 아버지 諱 계(棨)씨와 부인 해주 최씨(海州 崔氏)의 4男 中 長男으로 1865年 5月 17日 강화(江華)에서 출생(出生)하셨으며 字는 경순(耿淳)이고 號는 일우(一愚)이시다. 장성(長成)하면서 학업(學業)에 정진(精進)하시고 젊어서부터 사회운동(社會運動)의 선봉(先鋒)으로 활동(活動)하시고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의 3代 사장으로 크게 공헌(供獻)하고 회양군수(淮陽郡守)에 재임(在任)하는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郡民)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강화 진위대(鎭衛隊)의 참령을 거친뒤 기호학회(畿湖學會) 총무(總務)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이동휘(李東煇)씨와 특히 친밀(親密)하게 지냈으며 조선일보 3대 사장에 취임(就任)하여 그의 강직(强直)한 성품(性品)과 청족(淸族)의 자손(子孫)으로서 기개(氣槪)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1924年에는 조선일보사 판권(版權)이 신 석우(申 錫雨)씨에게 넘어가자 월남(月南) 이 상재(李 商在)선생에게 사장직(社長職)을 넘겨주고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 회장(會長)을 맡기도 하면서 서울 필운동에 은거(隱居)하다가 해방직전(解放直前)에 강화로 낙향(落鄕)하여 1946年에 향년(享年) 81歲로 타계(他界)하셨다. 부인(婦人) 전주 이씨(全州 李氏) 사이에 1男 벽(壁 : 시인)씨를 두셨으나 일찍 요절(夭折)하므로 조카 기(基)씨를 입양(入養)하여 代를 잇고 있다.
아래에 公과 조선일보(朝鮮日報)와의 얽힌 이야기를 소개(紹介)하기로 한다.
조선일보는 창간(創刊) 직후 극심(極甚)한 재정난(財政難)과 총독부(總督府)의 기사 탄압(記事 彈壓)에 시달렸다. 재정(財政)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주(社主)도 없었고 후원(後援)을 기대(期待)한 대정실업친목회와도 5개월 만에 결별(訣別)해 재정상태(財政狀態)는 말이 아니었다. 재정난으로 표류(漂流)하던 조선일보는 1921년 4월8일 송 병준(宋 秉晙)의 손에 넘어갔다.그는 “6000원의 헐가로 조선일보를 매수”(개벽 1924년10월)했다. 송 병준(宋 秉晙)은 이 완용(李 完用)과 더불어 매국(賣國)의 원흉(조선일보 1926년2월13일)으로 불리던 인물(人物)이다. 그는 처음엔 많은 이익을 붙여 조선일보를 다른 사람에게 다시 넘기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원로(元老) 언론인(言論人) 남궁 훈을 사장으로 영입(迎入)하기에 이른다. 남궁 훈은 당시 66세로 기개(氣槪)가 꼿꼿한 지사(志士)였다.그는 구한말 황성신문 사장을 지냈다. 1904년 이 신문이 경영난에 처하자 집문서를 저당(抵當) 잡혀 속간(續刊)시켰고, 1905년 장 지연의 유명한 논설(論說)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린 신문(新聞)을 배부(配付)하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 그는 이때를 회고(回顧)하며 “이날 신문을 배부하던 광경이 일생에 잊지 못할 일이며 민간신문을 성공(成功)시키지 못한 것이 일생(一生)에 유감(遺憾)” (조선일보 1932년1월6일) 이라고 했다.
남궁 훈은 송 병준의 거듭된 요청(要請)으로 사장직(社長職)을 맡으면서 두 가지 조건(條件)을 내세웠다.첫째, 신문 제작(新聞 製作)에 한 자라도 용훼(용훼)하지 말 것.둘째, 사원 채용(社員 採用)에 간섭(干涉)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는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잃지 말라고 하는 말과 같이 누구 돈이든지 일만 정당(正當)하게 하면 된다”고 사장직을 수락(受諾)한 이유(理由)를 설명(說明)했다.(조선일보 1933년4월27일) 그는 조선일보가 "민중의 벗”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판권(版權)은 송 병준이 가졌지만 지면 제작(紙面 製作)과 인사(人事)에서 남궁 훈은 송 병준의 간섭(干涉)을 차단(遮斷)했다. 남궁 훈은 기존(旣存)의 이름뿐이었던 사장들과 달리 사장의 실질적(實質的)인 업무(業務)를 철저(徹底)하게 챙겼다. 그는 수표동 사옥 2층 온돌방 사장실에 보료를 깐 채 신문 대장(인쇄하기 전의 지면)을 직접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겼다. “대소사무를 총괄(總括)하여 처리함은 물론이거니와 영영세세한 기사(記事)에까지 첨삭(添削)을 행하야 무불간섭의 태도”(개벽 1923년7월)를 취한 것이었다. 그는 ‘보도 제일주의’를 주창(主唱)해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관련 기사도 과감(果敢)하게 앞장서서 보도(報道)했다. “그 때 상해(上海)에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어 그 소식, 그 자료(資料)를 어떻게 할까?(논란이 있었습니다)나는 서슴지 않고 ‘보도’라고 했습니다. 보도! 한 신문으로서 기자(記者)의 직책(職責)으로서 다만 ‘보도’를 했다. 그 후에야 동아일보에서 서로 앞다투어 상해(上海) 임시정부 소식(消息)을 게재(揭載)하였다.”
다시 1920년대 초반 불이 붙기 시작한 조선인의 소작쟁의(小作爭議)에 대한 보도(報道)도 지시(指示)했다. 그는 “당국(當局)에서는 선동(煽動)을 한다는 등 여러 가지의 말이 있었다.”면서 “이역(또한) 중대한 사변이니까 다만 사실로서, 엄연한 사실로서 보도에 힘을 썼던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문 언론인(言論人)답게 활자(活字)를 바꾸고 지면(紙面)의 쇄신(刷新)을 加해 취임(就任) 당시 3000부이던 발행부수(發行部數)를 1만 5000부까지 끌어 올렸다. 1938年 조선일보 지령(紙齡) 6000호 기념호(記念號)는 이전 사장인 조 진태와 유 문환을 무시(無視)한 채 남궁 훈을 “조선일보 초대 사장”이라 적기도 했다.남궁 훈은 조선일보 사장으로 재직(在職)하는 동안 외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독립운동가4 현(炫)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아버지 諱 의씨와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2男 中 長男으로 1901년4월18일 출생(出生)하여 보성전문학교(寶城專門學敎)를 졸업(卒業)하였다. 1919년 3월13일 전라 북도 전주(全州)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萬世示威)때 남문(南門) 밖 장터에서 고형진,박태련 등과 함께 학생(學生), 시민(市民) 등 군중(群衆)들에게 태극기(太極旗)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配布)하고 시위(示威)를 주도(主導)하다가 일경(日警)붙잡혔다.같은해 8월 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光州地方法院 全州支廳)에서 징역(懲役) 1년을 언도(言渡) 받았으며 같은 해 9월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懲役) 6월을 선고(宣告) 받았는데 재판과정(裁判過程)에서 굽히지 않고 줄곧 법정투쟁(法庭鬪爭)을 전개(展開)하었다. 1927년 3월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영광 청년회에 가입(加入)하여 활동(活動)하였고, 같은 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민족해방투쟁(民族解放鬪爭)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31년 12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다.
1932년 7월부터 1933년 1월 사이에는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자택(自宅)에서 정판갑과 함께 조기 건조사업(乾燥事業)을 하여 그 수익금(收益金)으로 희생(犧牲)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가족(家族)들의 생계(生計)를 지원(支援)하는 조직(組織)을 설립(設立)하려다 사전(事前)에 발각(發覺)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1934년 7월 전주 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또다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2년이 확정(確定)되었다. 그 뒤 1939년 10월에도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또 다시 금고(禁錮) 8월을 언도 받았으며 1941년 3월19일 옥고(獄苦)의 여독(餘毒)으로 사망(死亡)하였다.
1986년 12월26일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追敍) 되었으며 (번호 486호), 대전국립묘지(大田國立墓地) 독립유공자묘역(獨立有功者墓域)에 이장(移葬)하여 안치(安置) 되었다. 유족(遺族)으로 아들 성(城)과 손자 신(臣)이 있으나, 아들은 출생 (39년1월27일) 1년여 만에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독립운동가5 태(珆)
公은 함열 남궁씨 세보상(世譜上) 32世로 지평공파 갑편(砥平公派 甲編)에 속한다. 아버지 혁(爀)公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1男1女 中 長男으로 1920年 8月1日에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976번지에서 출생(出生)하셨다.1933年 춘천 보통학교(現 春川 初等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춘천고등 보통학교(現 春川 高等學校)에 진학(進學)했다.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거성(巨星) 한서(翰西) 남궁 억 선생에게 감화(感化)를 받아 배일 사상(排日 思想)이 투철(透徹)했던 그는 춘천고보 5학년이던 1937년9월 동급생(同級生) 이 찬우, 문 세현, 용 환각, 백 흥기, 조 규석, 성 수경과 함께 조선(朝鮮)의 독립(獨立)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상록회”를 조직(組織)하고 부회장(副會長)에 취임(就任)하였다.(회장은 조 규석) 이때 “상록회”의 강령(綱領)도 채택(採擇)하였는 바, 1. 회원으로서 자기완성 2.지도자로서 책임완수 3.단결력 배양으로 항일투쟁을 한다는 것이며, 회가(會歌)도 직접 작사(作詞)했다.동시(同時)에 “상록회“의 활성화(活性化)와 동지 확보(同志 確保)를 위한 구체적(具體的)인 사업(事業)으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組織)하여, 매월(每月) 월례회(월례회)때 독후감(독후감) 발표(발표)와 함께 현실 문제와 민족의 독립문제(독립문제)를 토론(토론) 하였다.또한 나라의 독립이 농촌의 자립(自立)을 통해 가능(可能)하다고 판단(判斷)하고, 적극적인 농촌계몽사업(農村啓蒙事業)도 전개(展開)하였다.
1938년 3월25일 춘천고를 졸업한 뒤 이 찬우,문 세현,백 흥기 등과 함께 만주(滿州) 길림(吉林)의 김 춘광 동지(同志)의 집으로 피신(避身)하였으며 그곳에서 《만주 상록회》를 조직(組織)하였고 자신은 하얼빈 지역책으로 만선일보 하얼빈 지사장(支社長)이 되어 ‘한인교회”를 통한 특수공작임무(特殊工作任務)를 부여(賦與) 받았다. 이리하여 1938년 9월에는 춘고의 “상록회”활동(活動)이 교외 청년들과도 연결(連結)되었으며 만주(滿州)로 간 졸업생들이 독립운동 지도자(指導者)들과 연결됨으로써 더욱 활발(活發)하게 전개(展開)되었다. 이렇듯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지하활동(地下活動)을 전개하던 “상록회’ 의 장거는 1938년 말 일경에 탐지(探知)되어 관련자(關聯者) 137명이 검거(檢擧)되고 36명이 송치(送致)되는 비운(悲運)을 맞이했다. 1939년 12월27일에는 당시 경성지방법원 형사2부에 입건(入件)된 36명중 주모자(主謨者) 12명이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1조 위반(違反)으로 2년 6월의 징역형(懲役刑)이 언도 되었다. 公께서는 왼쪽팔이 불구(不具)가 되는 어려움 속에 1941년 출옥(出獄) 후 다시 만주로 피신(避身)하여 “만선일보” 기자(記者)로 활동(活動)하다가, 1944年에 남궁 명호란 이름으로 춘천에 귀향(歸鄕)하였으나 1945년 7월 20일 재차(再次) 일경의 검거령(檢擧令)이 내려져 고향(故鄕)인 모곡의 산중(山中)으로 피신(避身)하였다. 1945년 8.15광복(光復)을 맞아 춘천으로 돌아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서 잠시 활약(活躍)하다가 같은해 10월 24일에는 강원일보의 전신(前身)인 ‘ 《팽오통신》을 창간(創刊)하였으며 11월 27일 제27호부터 《강원일보》로 제호(題號)를 바꾸었다. 이 때 발행인(發行人) 겸 편집인(編輯人), 편집국장(編輯局長)을 겸임(兼任)하였다.
1948년에는 서울의 평화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집필활동(輯筆活動)을 하다가 1950년 6.25사변(事變)으로 다시 고향 모곡의 산중으로 피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부락민(部落民)의 밀고(密告)로 후퇴(後退)하는 인민군(人民軍)에게 피납되어 북으로 끌려 가던 중 춘천시 우두동에서 인민군에 의해 총살(銃殺) 당했다 한다. 이 때 태씨의 나이 만 30세에 불과(不過)했다.(목격자 백 태호 사망. 생존했을시 110세)유족(遺族)으로는 입양동생인 종(琮)씨가 춘천 후평동에 살고 있으며 부친(父親) 혁(爀)씨와 모친(母親)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아들의 소식(消息)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1960年과 1974年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註 : 춘천고등보통학교(春川高等普通學校)의 상록회운동(常綠會運動)은 춘천지방 학생비밀결사운동(學生秘密決死運動)의 선구적(先驅的)인 것으로 이 지역 학생운동에 큰 영향(影響)을 미쳤다. 1967년 4월26일 제 43회 개교기념일(開校記念日)을 맞이하여 상록회활동(常綠會活動)을 기리기 위한 《상록탑》의 제막식(除幕式)을 가졌다.
독립운동가6 혁(焱)
公은 세보상(世譜上)으로 31世이시며 지평공파 병편(砥平公派 丙編)에 속하신다. 아버지 회(檜)씨의 3男으로 1900년 1월 27일 출생(出生)하여 어린 소년시절 쓰러져 가는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애국심(愛國心)에 불타 기미년(己未年) 3.1운동에 참여(參與)한 후 항일독립운동가(抗日獨立運動家)로 활동(活動)하다가 해방(解放)을 맞고 1971년 별세(別世)하셨다. 公은 충북도지사(忠北道知事)를 지내신 영(營)씨의 막내동생이시다.
부인(婦人) 나주 채씨(羅州 蔡氏)와의 사이에 1女 만을 두시니 해주인(海州人) 오 현태(吳 鉉泰)이다.
독립운동가7 찬
公은 세보상(世譜上) 31世이시며 대사성 병편(大司成 丙編)에 속하신다.1912년 9월16일 아버지 표(杓)씨와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 趙氏) 사이의 5男 3女 中 차남(次男)으로 출생(出生)하였으나 장형(長兄 : 맏형) 현(炫)씨가 큰아버지에게 입양(入養)되므로 사실상(事實上) 장남(長男)이 되었다.
일본(日本)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을 졸업(卒業)하고 일찍부터 일제(日制)의 만행(蠻行)에 저항(抵抗)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에 투신(投身)하였으며 1942年에는 동아연맹(東亞連盟) 항일운동(抗日運動)으로 투옥(投獄)되어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조국(祖國)의 해방(解放)과 함께 출옥(出獄)하여 정부수립(政府樹立) 후에는 서울시 관재국장을 역임(歷任)하였다. 부인(婦人) 밀양 손씨(密陽 孫氏)와의 사이에 2男과 1女를 두시니 長男은 역곡(驛谷 : 부천시) 南宮病院長 승(勝)씨이고 次男은 준(遵)씨 1女는 수안인(遂安人) 이 두남(李 斗男)씨이다.
독립운동가8 식(植)
公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석목리에서 1885년 12월 23일 아버지 낙(洛)씨와 어머니 결성 장씨(結城 張氏)의 3男 1女 중 長男으로 출생(出生)하였다. 字는 훈오(薰五)이시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할 뿐 아니라 리장(里長)으로 20년을 재직(在職)하면서 동민들을 가족(家族)같이 친절(親切)히 보살피고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지도(指導)하며 한편으로는 독립정신(獨立精神)을 고취(鼓吹)시키어 일제(日制)가 침략자(侵略者)임을 주지(周知)시키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길을 선도(先導)하였다. 이에 감동(感動)하여 부여군수(扶餘郡守)로 추대(推戴)하였으나 극구(極口) 사양(辭讓)하여 끝내 응하지 않으셨다.
슬하(膝下)에는 부인(婦人) 김해 김씨(金海 金氏)와의 사이에 2男과 5女를 두시니 長男은 촉(燭)씨, 次男은 동양 의학박사이며 철학가인 상(祥)씨와 5女는 장발인(長髮人) 정 용구(鄭 容九), 임천인(醴泉人) 임 규상(林 奎相), 전의인(全義人) 이 동린(李 東麟), 연일인(延日人) 정 기철(鄭 基喆), 함양인(咸陽人) 박 의식(朴 義植)이다.
세보상(世譜上)으로는 대사성 병편(大司成 丙編)에 속하며 세수는 30세이시다.
독립운동가9 경숙(敬淑)
1911년 2월10일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서 아버지 찬(?)님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1男 2女 中 長女로 출생(出生)하여 모곡 보통학교를 거쳐 원산(元山)의 루시여고를 졸업(卒業)하고 1932년 모교(母校)의 교사(敎師)로 부임(赴任)하여 한서(翰西) 남궁 억(南宮 檍) 선생을 도와 일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는 무궁화 사건(事件)에 연루(연루)되어 28명이 투옥(投獄)되고 그 중 12명이 옥고(獄苦)를 함께 치루었다. 이분은 결혼(結婚)한지 얼마되지 않은 1943년에는 포천군 가산면 가산리로 이사(移徙)하여 보통학교 교사(普通學校 敎師)로, 또한 포천군청(抱川郡廳)에 재직(在職)하면서 대한부녀회(大韓婦女會) 포천군 지부장(抱川郡 支部長)을 맡아 여성운동(女性運動)과 사회계몽운동(社會啓蒙運動)을 지도(指導)하였다.
1949년에 가산교회(아버지 남궁 찬 장로가 개척)의 담임 전도사(擔任傳道師)로 부임(赴任)하여 (아버지 소천 직후) 전도(傳導)에 힘쓰며 미군(美軍)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신축(新築)하여 봉헌하고 이어 내촌교회, 포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향년(享年) 54歲로 너무 빨리 1964년 1월30일 소천(所天)하여 가산면 가산리 614-8에 안장(安葬)하였다.
부군(夫君) 이 원종(李 원종)씨의 슬하(膝下)에는 규철,규열 형제(兄弟)를 두었다. 오빠는 철학박사(哲學博士)인 탁과 여동생 정희(정희)씨는 삼선교회(삼선교회)의 장로이다. 세보상으로 31세 (砥平公.丁編)이다.
독립운동가10 천도교인 큰 욱(旭)과
작은 욱(昱)
욱(旭)씨는 1885년 12월25일 평산군 적암면에서 아버지 약(?)과 어머니 풍천임씨(豊川任氏)의 3男 2女 中 長男으로 출생(出生)하여 청년시절(靑年時節)에 천도교(天道敎)에 입문(入門)하여 33人의 한 사람인 최 린 선생과 함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참여(參與)하였다. 주로 중국(滿州)과 미국(美國)을 드나들며 활동(活動)하였으며 미국에서 임병직(前 外務長官)과 가까이 지냈다. 국내(國內)에서는 신분(身分)을 숨긱기 위하여 수시(隨詩)로 이사(移徙)하였다.그로 因하여 가족(家族)들의 생활(生活)은 아주 곤란(困難) 하였다. 신분을 위장(僞裝)하기 위하여 수증기(水蒸氣)로 치료(治療)하는 물리치료기(일제때는 아주 선진적이었다.)와 한약(漢藥)과 홍화가루를 가지고 많은 病을 고쳐 주기도 하였다.그러다가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강릉형무소에서 보냈다.일련의 행적으로 보아 만주에 있던 독립군과 미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후에는 청우당(靑友黨) 평산군 책으로 건국운동(建國運動)을 하시다 북한 정권에 의해 반동(反動)으로 몰려 투옥(投獄)되기도 하였다.
세보상(世譜上)으로 31 世(延安公派 丙編)에 屬하며 부인(婦人) 달성인(達城人) 서수정씨와 순흥인 안경자씨에서 4男 卽, 長男 두, 次男 홍룡,三男 복, 四男 정과 2女 김덕원과 녹자를 두었으나 아직도 이산(離散)의 아픔을 안고 남북(南北)으로 흩어져 살고있다.
한편 작은 욱(昱)이라는 욱씨는 큰 욱(旭)씨와 함께 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에서 같이 살면서 함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하였고, 해방후(解放後)에는 청우당 활동(靑友黨 活動)도 함께 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더 이상 자세한 행적(行跡)을 알 수가 없어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독립운동가11 농촌계몽 운동가 휴(烋)
1883年 6月7日 강화(江華)에서 출생(出生). 字는 경호(耿浩) 號는 녹은(祿隱)이며 아버지 계(棨)님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4男으로 세보상(世譜上)으로는 31世(大司成公,戊編)에 속한다. 아주 가난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났으나 영특(英特)하시어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여 한학(漢學)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효심(孝心) 또한 깊어서 선조(先祖)와 부모공경(父母恭敬)에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다하셨다. 일제(日制) 때 8대조(八代祖) 諱 헌(헌)의 묘소(墓所)가 있는 선산(先山)을 공동묘지(共同墓地)로 만들려고 할 때 온갖 방법(方法)을 써서 저지(沮止)하다가 일경(日警)에 연행(連行)되기도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자 결국(結局) 다른 곳으로 옮겨서 정하게 하였다.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유린되니 청년회를 조직하여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하는등 사회운동을 하며 동시에 항일 운동에도 앞장섰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15 해방후에는 농지개혁으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 위로 밭 4000평과 논 9000평이 농지 분배에 들어가 제향을 모시기 어렵게 되자 중앙 각계 요로에 앞장서서 진정한 나머지 분배에서 제외시키어 향사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이 공을 높이어 충렬사 경내에 유림에서 공적비를 세웠다. 강화 향교의 전교, 충렬사 도유사를 맡아 유림의 지도자로 헌신 하였다.
배우자는 전주 이씨로 슬하에는 3남2녀를 두시었다. 장남은 종친회 이사와 고문을 지낸 채씨,차남 용과 삼남 기 2녀는 이치평과 구성회이다. 특히 공의장형인 황성신문,조선일보의 사장을 지낸 훈(薰)씨이며 조카 시인 벽(壁)이 요절하므로 삼남 기(基)를 양자하여 대를 잇게 하였다.
독립운동가12 초대 뉴욕총영사관
염(炎)
남궁염은 1889년경 서울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남궁억의 외아들로, 일찍이 배재학당에서 영어공부를 한 뒤 1905년 일본에 체재하던 박영효의 도움으로 미국 여행권을 취득했다. 1907년 11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갔지만 정착에 어려움을 겪어 버지니아로 이동해 그곳에서 고학하여 랜돌프 매건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교수의 추천으로 한 은행에 취직했다가 마침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구성하고 있던 이승만과 만났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남궁억의 외아들을 머나먼 타지에서 조우한 것에 매우 반가워했고, 이때부터 남궁염은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구미위원부 활동을 도왔다. 그는 낮에는 은행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구미위원부에
나가 재무 일을 맡았으며, 미국에 체류하는 한인들에게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남궁염은 1924년 8월 20일 이승만의 소개로 우복자와 결혼했으며, 1926년 이승만을 후원하는 동지회가 뉴욕에서 창립될 때 참여했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주선소를 운영하기도 했고, 향수 도매를 하기도 했다. 또한 1928년 뉴욕 최초의 한글신문인 <3.1 신보>가 뉴욕에서 발행될 때, 그는 자녀들과 함께 발송 역할을 수행했다.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 후보를 역임했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8.15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뉴욕에 처음 뉴욕총영사관이 세워졌다. 뉴욕총영사관은 1949년 4월 1일을 기해 업무를 시작했고, 초대 총영사는 이승만의 특명에 따라 남궁염이 임명되었다. 남궁염은 마침 뉴욕에 와있던 이순용 전 내무장관과 함께 임시 사무실을 하나얻어 공관 준비를 하다가 본국 정부와 상의한 끝에 맨해튼에 건물 하나를 물색했다.
9E, 80가로 부근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구겐하임 박물관 등이 있는 이 4층 건물은 공관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지하실은 식당, 1, 2층은 사무실, 3, 4층은 사저로 개수를 마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하지만 해외공관 경비를 최소한 줄여 쓰라는 외무부의 훈령에 따라 가구를 변변히 구입하지 못해 아파트에서 사용하던 가구를 임시로 사용했고, 청소비를 절약하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려 남이 안볼 때 가족들이 총동원되어 청소를 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남궁염은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을 찾아가 위로했고, 한미재단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 구호물자 수송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미국 각지에 초청을 받아 한국의 어려운 실태를 설명하며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여러번 수행했다. 그는 총영사관 업무가 늘어나자 부영사로 최용진을 두고 고용원도 늘렸지만, 정작 자
가용 승용차를 두지 않았다.
1955년 7월 8일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理事官)에 임명되었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그해 6월 그도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롱아일랜드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하와이로 망명간 이승만을 방문하려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그러지 못하고 1961년 11월 29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롱아일랜드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74년에 화장된 뒤 국내로 이송되어 강원도 홍천 선영에 묻혔다.
남궁염의 장남 남궁준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미우주항공국 리서치 엔지니어로 근무했고, 둘째 딸 혜원은 아시아개발은행에 근무하던 민병휘와 결혼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터내셔널 스쿨의 카운슬러로 근무했다. 그리고 막내아들 남궁진은 미 농무성 산림국 육종고문으로 재직했고,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임목육종학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남궁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13 남양주 독립운동가
우룡(又龍)
1897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서 태어났다. 화도면 월산리의 3·1운동은 화도면에 거주하던 이달용(李達鎔) 등의 주도 아래 비밀리에 추진되다가 1919년 3월 16일에 사전 발각되었고, 이때 이택하(李澤夏), 이재하(李載夏), 이승보(李承輔) 등 다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07년 설립된 월산교회와 배인학당에서 선교와 교육 양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김필규(金弼圭)는 전열을 정비하여 1919년 3월 18일로 거사일을 다시 정하고 독립 만세 시위를 조직하였다.
1919년 3월 18일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 일대의 주민이 총궐기하여 면사무소가 있던 화도면 마석우리로 행진하였다. 남궁우룡도 이틀 전 시위 계획이 발각됨에 따라 체포된 이재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행진을 시작할 때 200여 명에 불과하였던 시위 군중은 어느새 1,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에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며 독립 만세 운동을 탄압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이달용을 비롯하여 손복산(孫福山), 신영희(申榮熙),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중상자도 다수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새벽에는 김필규, 강선원(姜善遠), 윤준(尹俊), 김원석(金元石) 등 다수의 인사가 만세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남궁우룡은 1919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이어가다가 1919년 9월 17일 가출옥되었다.
남궁우룡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월산교회 앞마당에 1993년에 세운 3·1운동 기념비가 있어 남궁우룡을 비롯한 당시 화도면 월산리 만세 시위 참여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99번지에도 남궁우룡을 비롯하여 화도면 일대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가14 종교활동가 석(錫)
남궁석은 1897년 1월 14일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0년 5월 전북 정읍에서 김언수(金彦洙), 금광간일(金光干日)이 창시한 신종교에 입교하여 종교 활동을 수행했다.
그가 신봉한 신종교는 시천교와 증산교의 뜻을 기초로 하여 유, 불, 선의 3교를 통합 한 것으로, 신통력을 가진 도통군자가 되기 위해 수양해야 하고, 강증산의 유저대순전경(遺著大巡典經)에 기초하여 ‘3재가 발생하여 부자, 지혜 있는 자, 권력계급은 대부분 죽어 없어지게 되며, 일본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은 멸망이 빨라지고 그때 도통군자 1만 2천명은 그 신통력에 의해 생존하고 조선은 독립을 얻게 되고 장래에 영구한 조선건국의 대공로자로서 우대받게 된다’고 강조했다.
남궁석은 이러한 교리에 따라 신통력 있는 도통군자 12,000명을 모으기 위해 종교적 수양 및 교세 확장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2년 2월 17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포교 활동에 몰두하던 그는 1964년 6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남궁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현대 인물 .
남궁련(南宮鍊, 1916년 ~ 2006년 2월 2일)
기업인으로,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회장 역임
1. 생애
- 1916년 서울 출생
- 일본 니혼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 1949년 극동해운 설립, 1959년 한국 석유 설립, 대표 취임
- 1962년~1963년 한국일보 사장, 1966년 금융통화위원
- 1968년 민영화된 대한조선공사 인수, 1988년까지 사장, 회장직 역임, 대형 선박 수출에 앞장서 1972년~1973년 연속 은탑 산업 훈장, 금탑 산업 훈장 수상, 1974년 '수출의 날' 포장자 선정
- 2006년 2월 2일 향년 90세 별세
2. 업적
- 남궁련은 대한조선공사를 이끌며 대한민국 조선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
- 그의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 조선업 시장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 남궁련은 조선업뿐만 아니라 중공업, 석유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약하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3. 평가
- 남궁련은 대한민국 조선업의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업인 중 하나로 꼽히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으로, 메트로신문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1. 출생
- 생년월일: 194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2. 학력
- 연세대학교 졸업
3. 경력
- 2005년부터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회장
-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메트로신문사 대표이사 사장
- 2002년 브이오엔 대표이사 회장
- 1985년 정보산업협회 부회장
- 1976년 포철기업 사장
4. 수상 - 2013년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특별상
- 2012년 제19회 장한 고대언론인상
- 2011년 제48회 한국출판문화상 대상
5. 저서
- <메트로신문사 사장 남궁호의 경영 에세이> (2006년, 에세이퍼블리싱)
6. 기타
- 남궁호는 메트로신문사를 창간하여 10여 년간 이끌어오면서, 신문사의 발전과 함께 대한 민국 언론계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 그는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브이오엔, 정보산업협회, 포철기업 등 다양한 기업에서 사장 및 회장을 역임하였다.
- 남궁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라는 책을 출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경영에 대한 조언과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다.
남궁호는 대한민국의 언론과 기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업적과 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남궁현(南宮炫, 1912년 ~ 1986년)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
1. 출생
- 1912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출생.
- 서울 철도중학교를 졸업.
2. 정치 경력
- 1945년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여군 위원장, 조선민족청년단 부여군 단장을 지냈다.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 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1948년 8월 7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 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지만 신병으로 인해 출마하지 못했다.
3. 사망
- 1986년 11월 24일 사망
남궁현은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남궁석(南宮晳, 1938.02.28 ~ 2009.1.16)
공무원 출신 기업인
1. 출생
- 1938년 2월 28일, 경기도 용인
2. 학력
- 선린상업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 경력
- 중앙일보 입사, 동양방송 기획실장 등 역임
- 1975년 삼성전자 기획조정실장
- 1982년 사표 제출 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공부
- 1986년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근무
-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 PC통신(현 KT알파) 초대 사장
- 1993년 삼성그룹으로 돌아와 삼성SDS 사장
- 1998년 말부터 2000년 초까지 정보통신부 장관
-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용인시 갑 선거구에 출마 남궁석은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IT 산업 육성과 정보화 사회
구현에 기여하였으며, 삼성SDS 사장 시절에는 회사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적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남궁진(南宮鎭, 1942년 12월 20일 ~)
정치인
1. 출생
- 1942년 12월 20일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교촌리
2. 학력
- 서울 중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3. 경력
-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추진 협의회에서 활동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선거대책 본부 부대변인 역임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광명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 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
- 1997년 새 천년민주당 창당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
- 1998년 대통령 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임명
- 2000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2002년까지 재직
- 새 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열린우리당 고문 등 역임
남궁진은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특히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문화 예술과 관광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교육학자
1. 출생
- 1949년 9월 15일,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2. 학력
- 중앙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
3. 경력
- 관동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 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역임
4. 저서
- 교육의 역사 철학적 기초
- 교육학 총론
- 한국 개화기의 사회교육 연구
- 일제 침탈기의 민족 사회교육 연구
남궁용권은 교육학자로서 교육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한국의 사회교육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산부인과 의사
1. 출생
- 1956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
2. 학력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석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박사
3. 경력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과장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의무부총장 겸 의무원장
경제 관료 출신
1. 출생
- 1951년 서울
2. 학력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 행정고시 10회로 공직에 입문
3. 경력
- 재정경제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 등을 추진하여 경제 안정화에 기여했다.
- 기획예산처에서는 예산총괄심의관과 재정기획국장 등을 역임하며 국가 재정의 효율적인 운용과 투명성 제고에 기여했다.
- 예금보험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부실 금융기관 정리와 공적자금 회수 등을 통해 예 금자 보호와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했다.
- 금융통화위원으로 활동하며 통화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참여했다.
남궁훈은 공직 생활 동안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쌓아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기업인으로, 아이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와 재단법인 게임인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1. 출생
- 1962년생
2.학력
- 서강대학교를 졸업
3.경력
- 카카오의 공동창업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 카카오게임즈의 대표이사를 거쳐 2022년 3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카카오의 대표이사를 역임하였다.
- 2023년 11월 아이즈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 2020년에는 제12회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게임산업 발전 유공 부문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 하였다.
게임인재단 이사장으로서 게임 산업의 발전과 게임 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게임 산업이 더욱 발전하고 건강한 게임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배우로 1999년 데뷔 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연 역할에 머무르며 무명의 시 절을 보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며 주연급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주연을 맡은 후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 '마이 시 크릿 호텔', '김과장', '스토브 리그', '검은 태양', '낮과 밤', '닥터 프리즈너', '365: 운명을 거 스르는 1년', '어느 날', '천원짜리 변호사' 등에 출연하며 주연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영화 '비정규직 특수 요원', '라이트 마이 파이어', '월색유인' 등에도 출연하며 스크린에서도 활약하였다.
2024년 제60회 백상예술대상 TV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고 2023년 MBC 연기대상 대상, 2023년 제36회 그리메상 최우수 연기자상, 2023년 제14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 총리 표창을 수상하였다.
남궁민은 연기력과 흥행력을 모두 갖춘 배우로 평가받으며, 대한민국의 대중문화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